2020.5.30 토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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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잃은 싯다르타의 상실감
2020년 03월 01일 (일) [조회수 : 38]
   
 

야외 출산이 위험했던 걸까. 마야 부인은 왕자를 출산하고 1주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왕은 아내를 잃었고, 왕자는 엄마를 잃었다. 룸비니 동산을 거닐며 나는 생각했다. ‘출산 도중 과다출혈이 있었을까?’ ‘아기의 머리부터 나오지 않는 난산이었을까?’ 마야 부인의 출산 후 죽음에 대해 혹자는 ‘제왕절개’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때는 부족국가 시대였다. 왕위를 계승할 자식의 목숨을 왕비의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겼을 터이다. 그러니 왕자를 살리기 위해 왕비의 배를 가르는 제왕절개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왕비의 죽음을 유추한다.
 
알 수는 없다. 팔리어 경전에는 출산 중 위험 상황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 오히려 마야 부인이 ‘아소카 나뭇가지를 붙들고 아무런 고통 없이 왕자를 낳았다’고 기록돼 있다. 어찌 됐든 싯다르타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었다. 그래서 룸비니 동산에는 붓다 탄생으로 인한 ‘기쁨의 선율’만 흐르지 않는다. 이와 함께 나자마자 엄마를 상실한 ‘슬픔의 선율’도 함께 흐른다.
 
나는 룸비니 동산을 거닐었다. 나무 아래에 앉았다. 햇볕은 따가웠고, 그늘 아래는 시원했다. 룸비니에서 카필라 성은 그리 멀지 않다. 싯다르타 왕자는 카필라 성에서 자랐다. 그러니 가끔 찾지 않았을까. 엄마가 그리울 때 말이다. 자신이 태어났고, 엄마와 함께 했던 짧은 순간의 장소, 룸비니 동산을 찾지 않았을까. 나는 앉아서 ‘싯다르타의 사춘기’를 생각했다.
 
붓다는 인간이다. 그러니 그에게도 사춘기는 있었을 터이다.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마야 부인의 여동생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왕비가 됐다. 싯다르타에게는 친이모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도의 고대 부족국가에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부인이 죽으면 부인의 여동생과 다시 결혼하기도 했다. 결혼은 부족과 부족간 결합이었다.
 
그럼 고타미가 왕의 여인이 된 시점은 언제였을까. 마야 부인이 시집올 때 그의 자매들이 한꺼번에 숫도다나 왕의 여인이 됐을 수도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어쨌든 기록에 따르면 마야 부인이 싯다르타를 낳았을 때, 고타미에게는 이미 친자식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유모에게 맡긴 채 싯다르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렸다고 한다.
 
싯다르타에게는 엄마를 대신하는 이모였다. 직접 젖을 먹이며 자신을 키운 사람이다. 훗날 고타미는 출가해 불교 역사상 첫 비구니가 된다. 그렇다고 싯다르타에게 상실감이 없었을까. 자신을 낳다가 엄마가 숨졌는데 말이다. 어린 싯다르타의 가슴 한 편에는 구멍이 뚫렸으리라. 그 구멍 사이로 바람이 넘나들었으리라. 그런 상실감 속에서 싯다르타는 사춘기를 맞았으리라. 존재의 뿌리에 대한 근원적인 상실감. 그게 어린 싯다르타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을 가능케하지 않았을까.  
 
차를 타고 룸비니에서 멀지 않은 카필라 성터로 갔다. 뜻밖에도 카필라 성터는 두 군데다. 서로 지척이지만 하나는 인도 땅, 또 하나는 네팔 땅이다. 두 성의 거리는 불과 10㎞다. 역사학자들은 “고대에는 모두 카필라 왕국의 영토였고, 둘 다 싯다르타가 성장기를 보낸 카필라 성의 일부일 것”이라고 말한다. 싯다르타는 거기서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궁을 옮겨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나는 인도 피프라하와에 있는 카필라 성터로 갔다. 1971년 이곳의 탑에서 사리함이 출토됐다. 사리함에는 ‘이것은 샤카족 붓다의 사리함이다. 그의 형제, 자매, 처자들이 모셨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성터에는 저 멀리 넓은 잔디밭과 나무가 무성한 숲이 보였다. 2600년 전, 이곳에서 싯다르타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왕자는 저 뜰을 뛰어다니고, 저 언덕의 나무 아래서 숨을 돌렸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성터에서 인도 여성들이 빗자루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유적지를 청소하는 이들은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하층 계급에 속했다. 야트막한 언덕에서 일을 하던 인도인 성터 관리인이 멀리서 손짓을 했다. “이쪽으로 오라”는 신호였다. 가서 보니 땅바닥을 조금씩 파헤치고 있었다. 손으로 흙을 쓸어서 치워나가자 까맣게 숯이 된 볍씨가 나왔다. 놀라웠다.
 
“이게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부처님 당시에 이곳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그때 쌀밥을 먹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언뜻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이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라면 그곳이 고고학 발굴 현장이 되지 않았을까. 인도는 아직도 고대 유적 관리에 소홀하다. 수천 년 전의 불상이 땅속에 파묻혀 있는 지역도 있다. 머리만 땅 위에 내놓은 채 말이다. 그걸 감안하면 카필라 성터에서 찾아낸 볍씨도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인도에서는 그랬다.
 
싯다르타의 아버지. 그의 이름은 숫도다나였다. 한자로는 ‘정반왕(淨飯王)’이다.  ‘정반’은 ‘흰 쌀밥’이란 뜻이다. 카필라 왕국은 부유한 왕국이었을까. 당시에 이미 벼농사를 짓고 있었고, 흰 쌀밥을 먹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는 3000년 전부터 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인더스 문명은 세계 4대 문명이다. 그러니 고대 인도인들은 일찌감치 벼농사를 지었으리라. 그래도 왕명이 참 재미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흰쌀밥 왕’쯤 된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 등장하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이름은 ‘주먹 쥐고 일어서’였다. 그야말로 즉자적이고 직설적이다. 달리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니 ‘정반왕’에는 백성을 두루두루 배불리 먹이고자 하는 카필라 왕국의 이상이 담긴 것이었을까.
 
카필라 성터에는 큼직한 연못이 있었다. 거기에 연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초기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서도 연꽃을 노래하는 구절이 있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나는 연못가에 앉아서 그 구절을 되씹었다. ‘연꽃은 어디에서 올라올까. 진흙에서 올라온다. 그러니 진흙이 없으면 연꽃도 없다. 진흙의 속성과 연꽃의 속성이 한 몸이다. 그걸 알면 좋음과 싫음을 나누는 경계가 무너져 내린다. 그때 비로소 연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얼음이 물에 물들지 않는 이치와 같다. 둘의 속성이 하나이기에.’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글 |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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