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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어떻게 일곱 걸음을 걸었을까?
2020년 02월 01일 (토) [조회수 : 17]
   
 

룸비니에서 태어난 아기 왕자는 일곱 걸음을 걸었다. 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본 뒤,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혹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몰아친다. “아니, 방금 태어난 신생아가 어떻게 걸음을 걷느냐?”며 “그게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라고 따진다. 그런데 아기 왕자의 일곱 걸음 일화를 두고 “사실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건 어리석다. 그 속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를 깨닫고, 그걸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붓다는 ‘초인적 이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 대신 이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더 자유롭고, 더 평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그러니 ‘왕자의 일곱 걸음’에 담긴 뜻을 아는 것이 훨씬 더 값진 일이다.
 
룸비니 동산은 참 아름다웠다. 곳곳에 나무가 서 있고, 초록과 꽃들이 넘실거렸다. 일화 속의 아기 왕자는 이곳을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서 연꽃이 올라와 아기 왕자를 받쳤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아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한자로 풀이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다.
 
언뜻 들으면 참 오만하다. 아니, 이 세상에서 자기만 가장 존귀하다니 말이다. 그래서 “붓다의 출생 직후 외침은 독선적”이라고 쏘아대는 이들도 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不二’라고 가르친 붓다가 어떻게 “내가 가장 잘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오만한 선언”이라는 비판도 꽤 있다. 심지어 법정 스님이 번역한 일본의 저명한 불교문학가 와타나베 쇼코의 저서 『불타 석가모니』에서도 비슷한 식으로 풀이한다. 쇼코는 “지혜와 선정, 지계와 선근에서 자기만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이러한 뜻을 가리킨다”고 풀이했다.
 
마야 부인이 아기를 낳았다는 장소가 마야데비 사원이다. 그 안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 아기 왕자가 나자마자 주위를 둘러봤다는 사방(四方)이다. 그건 막힘 없이 터져 있는 우주를 뜻한다.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독선적 선언”이라는 비판에 동의할 수가 없다. 또 쇼코가 찬탄했던 “남들이 닿지 못하는 붓다의 경지가 최고”라는 뜻풀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독존(獨尊)’에 밑줄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만이 최고” “붓다만이 진리”라는 해석을 앞다투어 내놓는다.
 
나는 룸비니 동산을 걸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인도에서는 룸비니가 성지 중의 성지라 신발은 따로 신발 주머니에 넣게끔 돼 있었다. 발바닥에 와 닿는 바닥의 촉감이 좋았다. 아기 왕자가 일곱 걸음을 뗐다는 땅 위를 밟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아기 왕자가 밟았다는 땅 위를 나의 발도 밟을 수 있겠네. 그렇게 겹칠 수도 있겠네.’ 그런 우연 가득한 상상을 하며 나는 룸비니 동산을 거닐었다. 그러다 물음이 올라왔다.
 
‘왕자는 정말 나자마자 걸었을까?’ 물론 아니다. 과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대신 여기에는 더 깊은 상징과 울림이 깃들어 있다. 그런 상징이야말로 이 일화가 존재하는 진짜 이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 많은 사람이 ‘독존’에 방점을 찍는다. 그게 아니다. 핵심은 ‘독존(獨尊)’이 아니라 ‘유아(唯我)’이다. 다시 말해 ‘오직 나만이’라는 대목이다. 아기 붓다는 왜 “오직 나만이”라고 했을까. 여기서 말하는 ‘나’는 과연 무슨 뜻일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여기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숨겨져 있다.

아기 붓다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나머지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왜 그랬을까. 그럴 때 우주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주를 관통하는 걸까. 이 물음의 끝에 답이 있다. 그건 바로 ‘붓다의 정체성’이다. 2600년 전에 우리가 룸비니 동산의 출산 현장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우리 눈에는 갓 태어난 아기 왕자만 보였을 터이다. 그러나 훗날 깨달음을 이룰 그 왕자의 정체는 조그만 육신에 갇혀있지 않았다. 하늘 위, 땅 아래를 관통하며 이 우주와 오롯이 일치하는 ‘하나의 주인공’만 있을 뿐이다. 이 우주에는 다른 무엇도 없고, 오로지 그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게 붓다의 정체다. 그래서 ‘유아(唯我)’다. ‘유아’란 그토록 큰 뜻이다.
 
룸비니 동산을 돌면서 생각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참으로 희망적인 선언이다. 왜 그럴까. 이 우주에는 딱 하나의 주인공만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주인공이 따로 있고, 나의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의 주인공, 그게 우리 모두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아기 붓다의 선언은 전혀 독선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붓다가 말하는 ‘나’는 우리 모두의 주인공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왜 가능할까.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주인공만 있으니까. 그래서 ‘유아(唯我)’이며, 그 ‘오직 나’가 존귀하다. 그래서 ‘독존(獨尊)’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붓다의 주인공이 나의 주인공이고, 붓다의 존귀함이 곧 우리의 존귀함이다. 아기 왕자는 나자마자 그런 ‘본질적 희망, 존재적 희망’을 이 세상에 선포한 것이다.
 
아기 왕자는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밝힘과 동시에,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우리의 정체를 지적한 셈이다. 수덕사의 만공 선사는 그걸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표현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고 노래했다. 그 ‘한 송이 꽃’이 바로 ‘오직 나(唯我)’이다. 나와 우주를 동시에 관통하는 한 송이 꽃이다.
 
바람이 불었다. 룸비니 동산에 서 있는 아소카 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흔들렸다. 아소카 나무의 잎은 화살처럼 뾰족하다. 그리고 꽃이 붉어서 참 아름답다. 나는 그 나무 아래로 가서 앉았다. 산들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상쾌했다. 아기 왕자가 설한 ‘오직 나(唯我)’는 큰 나다. 작은 나가 아니다. 붓다는 우리에게 “큰 나를 찾으라”고 말한다. 그렇게 큰 배를 타고서, 파도 치는 세상을 성큼성큼 지나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힘차게 살아가라고 어깨를 두드린다. 우리 모두가 그런 배를 저어갈 만큼 존귀한 존재라고 말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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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글 |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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