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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이란
원각경 보안보살장의 말씀에서(13)
2020년 01월 02일 (목) [조회수 : 17]
   
 

아! 그래서 ‘망상(妄想)’이라 하는구나.
자신의 삶에도, 타인의 삶에도 지극히 엄격한 분일 것이라 여겼는데 …… 사실 부처님은 치밀한 논리에 재치까지 겸비한 멋진 이야기꾼이셨다. 그분의 말씀을 듣다보면 절로 웃음이 나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절로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세상에 저런 분이 계신다니, 놀라웠다.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참을 깔깔대던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당신의 현재를 지배하는 그 과거가 본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시겠습니까?”
“네, 부처님. 고갯마루에 처녀귀신이 있다고 여기는 한 처녀귀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직접 만나건, 직접 만나지 않건, 처녀귀신은 ‘처녀귀신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침투하여 불안과 공포를 조장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왜 ‘몸도 마음도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셨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다.”
부처님께서 곧바로 되물으셨다.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다들 ‘나의 몸’이라 말하고, ‘나의 마음’이라 말하지만 ‘나’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입니다. 고갯마루의 처녀귀신이랑 마찬가지지요.”
“그럼 ‘나’를 떼어낸 ‘몸’과 ‘마음’은 어떻습니까?”
“몸도 마음도 인연 따라 출렁이는 물결일 뿐이고, 햇살의 움직임 따라 끝없이 모양을 바꾸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사실 그런 특성이 삶에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를 일으키지요?”
“바로 ‘나’라는 그것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어떻게 문제를 일으키지요?”
“육체도 생각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따라 끝없이 모양을 바꿉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변화를 하나의 틀 속에 담는 그 ‘나’라는 것은 허상입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고갯마루 처녀귀신과 같은 그런 ‘나’가 존재한다고 여기면, 과거는 이미 사라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관여하는 과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과거가 ‘나의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관념 속 ‘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변화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니, ‘나의 과거’ 또한 시간의 변화와 상관없이 존재하게 됩니다. 미래도 마찬가지겠지요.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나’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한, 과거에 있었던 사건과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 미래에 닥칠 사건과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은 고갯마루 처녀귀신에게 사로잡힌 자의 삶만큼이나 불안정하고 또 의미가 없습니다. 고갯마루에서 만난 처녀귀신에 대해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해도 몽땅 헛생각이고,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몽땅 허튼소리고, 아무리 많은 대처방안을 시행해도 몽땅 허튼 짓이지요.”
부처님께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셨다.
“뼈아픈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헛생각이나 하고, 허튼소리나 떠들고, 허튼 짓이나 하다가 삶을 마감한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미혹(迷惑)한 중생(衆生)이었다는 걸 이제 알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으셨다.
“아닙니다. 당신은 이제 보살(菩薩)입니다.”
“보살요? 절에 다니는 여성들을 부를 때 쓰는 호칭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깔깔대며 웃으셨다.
“그건 정말 보살이 되시라고, 또 보살처럼 사시라고 권장하고 축원하는 의미에서 그리 부르는 것이지요. 본래 ‘보살’은 절에 다니는 여성에게 붙이는 호칭이 아니랍니다.”
“그럼, 본래 보살은 어떤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입니까?”
“깨달은 사람,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완전함을 향해 바로 나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살이라 하지요.”
그가 손사래를 쳤다.
“깨달은 사람이요? 아이쿠, 그런 과분한 호칭이라면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미혹한 중생이라고요.”
부처님께서 환한 미소를 보이셨다.
“그래서 당신을 이제 ‘보살’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별다른 게 아닙니다. 중생이 중생인 줄 깨닫는 것 그게 깨달음이고, 그런 사람이 보살입니다. 욕심내고 화내고 원망하고 불안해하던 사람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내가 여태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그게 깨달음이고, 그런 사람이 보살입니다.
중생을 왜 중생이라 할까요? 중생은 절대 스스로를 못나고 어리석은 중생이라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견해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욕심내고 성질내고 싸우고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의 행동을 너무나 정당하다 주장하며, 그러고 있는 현재의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중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감히 보살이라 칭할 자격이 되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지만, 부처님, 그게 몽땅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부처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됐습니다. 그럼 이제 그 앎을 당신의 일상에서 실천할 차례입니다.”
“실천이요?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바보 같은 짓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건 ‘하지 않는 것’이지 않습니까?”
“무언가를 ‘하는 것’도 당신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이고,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도 당신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하지 않는 것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위(無爲)’라 합니다. 누구를 만나건, 어떤 일을 겪건, 더 이상 번민의 먼지를 일으키지 않고, 더 이상 갈등의 불씨를 지피지 않는 것, 그것이 이제 당신이 일상에서 구현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 과제를 충실히 수행한다면 당신의 일상에서 지극한 평온함이 지속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고뇌와 아픔이 사라진 삶, 열반(涅槃)이라 부릅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처님, 지금 마음 같아서는 두 번 다시 누구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바라고 욕심나는 것도 별로 없고요. 하지만 부처님 이 마음을 과연 지속할 수 있을까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웃으셨다.
“그래서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알긴 알았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은 사람, 따라서 완전함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야할 사람, 그런 이를 보살이라 하는 것입니다. 완전하면 당신을 부처님이라 불렀겠지요.”
“부처님, 만약 다시 욕망과 분노가 제 마음에 스며든다면,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번뜩 정신 차리고, 분노와 욕망을 깨끗이 닦아내야지요. 걸레로 먼지를 닦아내듯이.”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부처님, 그 걸레를 한 장만 주십시오.”
재롱부리는 아이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품안에 잔뜩 쌓아둔 걸레는 다 어디다 쓰려고?”
두 사람은 한참이나 깔깔대고 웃었다.


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등이 있다.

글 | 성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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