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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마루 처녀귀신
원각경 보안보살장의 말씀에서(12)
2019년 12월 02일 (월) [조회수 : 84]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기억이 당신의 현재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네, 인정합니다.”
“기억은 이미 흘러간 과거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네, 인정합니다.”
“이미 흘러간 것은 허망虛妄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네,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허망한 기억 때문에 현재의 삶이 방해받을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그게 안 된다니까요, 부처님. ‘지난 과거의 일일 뿐이야’ 하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그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어깨를 뒤로 젖히며 약간 몸을 빼셨다. 
“당신은 ‘기억은 허망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기억이 허망하다는 것을 제대로 모르고 있군요.”
그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모르긴 제가 왜 모릅니까? 저도 ‘기억은 허망하다’고 생각한다니까요?”
부처님께서 손을 내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닙니다. 당신은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허망인 줄 안다면 그 허망한 것에 사로잡힐 리가 없습니다.”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부처님께서 웃으셨다.
“제가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볼까요?”
“네, 좋습니다.”
“지금처럼 도로가 뻥뻥 뚫리고 차가 씽씽 달리는 시절이 아니라 가로등도 없고 재 너머 오솔길을 걸어 옆 마을로 놀러 다니던 한 50년 쯤 전이라고 합시다. 한 사내가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장날이라 큰맘 먹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이일 저일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간만에 나들이니 주머니에 돈도 두둑이 챙겼습니다.
그렇게 재를 넘어 제법 왁자지껄한 장터에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도 사고, 새로운 물건들도 구경했습니다. 그러다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났습니다. 간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에 서로는 따끈한 국밥에다 막걸리까지 한잔 걸쳤고, 친구는 기어이 자신의 집까지 그의 손을 끌었습니다. 그렇게 친구의 집에서 또 한잔 두잔 마시다보니 두 사람 모두 취했고,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습니다.
술김에도 아차 싶었던지, 사내는 허겁지겁 친구와 이별하고 주섬주섬 장거리를 챙겨 집으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얼마 걷지도 못해 해가 곧 떨어졌고, 어둠이 사방에 몰려들었습니다. 게다가 달은커녕 갑자기 비까지 부슬부슬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스산한 비바람 속에서 한 점의 불빛도 없는 산길을 걷자니 알큰했던 술기운이 온데간데없고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에도 머리털이 곤두섰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휙~ 하니 불어오는 바람에 길가 큰 소나무에서 뭔가 희끗한 것이 흔들렸습니다. 뭔가 싶어 눈길을 모았던 사내는 기겁을 하고 뒤로 자빠졌습니다. 장터에서 산 굴비고 냄비고 뭐고 몽땅 내팽개치고는 뒤돌아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을 좇아 달렸습니다. 그렇게 어찌어찌 장터 마을의 친구 집까지 달려온 사내는 넋을 놓고 울부짖었습니다. 얼마나 나뒹굴었는지 온통 흙투성이에 옷도 찢어지고 신발도 벗겨진 채였습니다. 그 몰골에 놀란 것은 친구만이 아니었습니다. 웬 소란인가 싶어 동네사람들까지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친구는 사내의 등을 다독이며 냉수를 한 잔 마시도록 권하였습니다. 사내가 냉수를 마시고 길게 호흡을 뱉어내자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 왜 이러나? 가다가 호랑이라도 만난 건가?’
‘그게 아니라, 저 잿마루에 있는 소나무 말이야.’
‘소나무가 왜?’
‘그 소나무 곁에서 한 여자를 만났어.’
‘이 한밤중에 여자가 고갯마루에 서있었다고? 그럴 리가 ……’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동네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한 아주머니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생겼던가요? 키는 얼마쯤 되던가요?’
‘키는 한 160cm쯤 되고, 나이는 한 열아홉쯤 되려나? 하여튼 갸름한 얼굴에 머리카락이 긴 여자가 소복을 입고 소나무 아래에 서있지 뭡니까.’
그러자 아주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맞네! 영자가 그 고갯마루 소나무에 목을 맺잖아.’
동네사람들은 너도나도 맞장구를 치며 불쌍한 영자의 삶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아휴, 불쌍한 것,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처녀귀신이 되었을까.’
하지만 동정의 수군거림도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느새 동네 사람들은 그 불쌍한 영자귀신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절에 위패를 모시고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는 사람, 용한 무당을 불러 굿을 해야 한다는 사람, 그 소나무에 철마다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사람, 영자를 죽음으로 내몬 배신자 용팔이를 혼내줘야 한다는 사람 등 동네사람들의 갑론을박으로 온 마당이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나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처녀귀신을 물리칠 방법을 논의할 때가 아닙니다. 먼저 제 친구가 본 것이 정말 처녀귀신인지, 그것도 영자가 맞는지 먼저 확인해 봅시다. 영자의 원혼을 달랠 방법은 그 다음에 논의해도 충분합니다.’
친구는 용감한 마을 청년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고갯마루로 나섰습니다. 동네사람들도 멀찌감치 뒤따랐습니다. 멀리 소나무가 보이는 곳까지 다가서자 뭔가 희끗한 것이 정말 치맛자락처럼 흔들렸습니다. 두려움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친구는 용기를 내어 한발 한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 하얀 치맛자락에 횃불을 비추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한숨처럼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에이~, 뭐야. 이건 애기들 기저귀잖아!’
뉘집 마당에 널어놓은 기저귀천이 바람에 날려 소나무 가지에 걸렸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한참을 깔깔대고 웃다가 물으셨다. 
“자, 어떻습니까? 고갯마루의 처녀귀신을 어떻게 하면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있지도 않은 귀신을 물리치긴 뭘 물리칩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처녀귀신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하는 논의는 그 처녀귀신이 허망한 줄 모를 때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귀저기천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처녀귀신은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즉 ‘처녀귀신은 허망하다’는 것을 정말로 안다면 처녀귀신 때문에 왈가왈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말한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억이 과거의 그림자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안다면, 즉 ‘기억은 허망하다’는 것을 정말로 안다면 그 기억 때문에 왈가왈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허망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하는 말은 ‘어떻게 하면 허망한 처녀귀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라는 말만큼이나 어처구니없습니다. 처녀귀신이 허망虛妄이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저절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따로 자유로울 방법을 찾고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것이 허망이란 걸 모르는 것입니다.”

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등이 있다.

글 | 성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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