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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6)
2019년 10월 02일 (수) [조회수 : 44]
   
 

그리운 어머니.
요즘 성북동을 자주 찾아갑니다. 거기엔 법정스님이 계셨던 길상사를 비롯해 여러 문인들이 살던 가옥과 아름다운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거든요. 그 산책길에서 제가 가끔 머무는 곳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말년에 기거했던 심우장尋牛莊입니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란 뜻이지요. 어머니도 아시겠지만, 소란 마음을 뜻합니다. 절집 벽화로 많이 그려지는 심우도(십우도)에서 그 이름을 따온 집이지요. 그런데 심우장은 사람이 살기 힘든 북향집이에요. 일설에는 만해스님이 조선총독부가 있는 방향을 등지기 위해 북향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실제 가보니 북향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산기슭에 위치해 있더군요. 일본에 저항하는 뜻으로 북향 기슭에 터를 잡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확언하기 어렵지만, 그 자그마하고 어둑한 집에는 확실히 어떤 기운이 흐르고 있더군요. 심우장 반대편인 남향 구릉지에서 햇살을 가득 안고 서있는 호화로운 저택들에선 찾을 수 없는 어떤 올곧고 담대한 기백 같은 것 말이지요. 심우장은 삶에 대한 가르침을 던지는 공간입니다. 그것은 죽어도 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삶도 있는 반면에 살아도 살아있다고 말하기 힘든 삶도 있다는 것이지요. 거기에 서면 내 삶은 과연 어디에 속하는지 자꾸만 돌아보게 됩니다. 언젠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심우장에 가보고 싶습니다. 


대승보살의 실천수행 - 육바라밀

어머니, 지난 시간에는 대승보살의 서원誓願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서원의 첫 번째는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불도를 다 이루겠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그리하여 이 땅을 청정한 불국토로 만들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서원을 이루기 위해 대승보살이 어떻게 닦아나가고 실천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대승보살의 서원이 짓고자 하는 집을 그린 설계도라면, 그 실천수행은 목재와 돌을 가지고 실제로 그 집을 세우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지요.  

대승보살은 어떤 방법으로 거룩한 서원을 현실로 만들어갈까요? 우리처럼 절을 하거나 염불, 혹은 화두참구를 할까요, 아니면 대승보살만의 특별한 수행법이 있을까요? 원칙적으로 대승보살은 초기불교부터 전해져 내려온 사성제, 십이연기, 삼십칠조도품 등의 수많은 수행법을 모두 닦습니다. 대승보살이라고 해서 이전의 수행법을 무시하면서 별도의 수행법만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노래방에 가면 부르는 애창곡이 있듯이, 대승보살의 애창곡에 해당하는 수행법도 있겠지요. 그것이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육바라밀 수행은 우리가 자주 들어온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육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반야)의 여섯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보시는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이고, 지계는 계율을 잘 지켜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고, 인욕은 화를 내거나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지 않는 것이고, 정진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 흔들림 없이 행하는 것이고, 선정은 마음이 주변의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고, 지혜(반야)는 모든 것이 연기로 이루어져 공空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섯 실천항목은 이미 초기불전에도 있는 수행법입니다. 이 여섯 가지 실천이 대승보살을 대표하는 실천수행법이 되려면 각각의 실천에 항상 ‘바라밀’이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기억나시나요? 지난 시간에 ‘보시’와 ‘보시바라밀’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보시가 중생이 선업을 쌓는 것에 그치는 행위라면, 보시바라밀은 공이 그 바탕에 깔려있는 ‘무주상보시’여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반야경』의 구절을 통해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아난이 세존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행하면 보시가 보시바라밀이 되고, 내지 반야가 반야바라밀이 되는 것입니까?’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불이법不二法으로써 깨달음에 회향하면 이를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연기법으로 생겨난 모든 존재는 실제로 생겨남도 없고[不生], 그로 인한 얻음도 없기 때문이다[不可得].”
 
위에서 ‘불이법’이란 바로 중생의 시비분별과 망상을 떠난 지혜인 공空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육바라밀 가운데 마지막 지혜(반야)바라밀이 모든 바라밀행의 기초이자 핵심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불자들은 늘 모든 예불과 의례에서 늘 『반야심경』을 외운 것이겠지요. 모든 것이 연기되어 공하다는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불교의례나 의식도 깨달음을 향한 회향이 되지 못하고, 욕망으로서 업業으로 변질되기 십상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보시가 대승보살의 육바라밀행인지, 아니면 불교의 바라밀행을 표방한 세속적 욕망인지 스님이나 다른 도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불전에 보시를 올리면서 이 행위로 인해 더 많은 이익이 나와 내 가족에게 돌아오기를 빌었다면 그것은 보시입니다. 그러나 보시를 하면서 이 행위가 깨달음을 위한 회향이 되길 원하는 마음을 내었다면 그것은 보시바라밀이겠지요. 똑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서 바라밀행이 되기도 하고, 업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불교를 다름 아닌 마음[心]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어머니, 그런데 무엇이 보시바라밀이 아닌 줄은 알겠는데, 무엇이 보시바라밀인지는 애매하지 않으신가요? ‘불이법의 체득’이나 ‘깨달음에 회향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육바라밀이 진정한 바라밀행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아야겠지요. 이에 관해서 『반야경』에선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탐심을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 보시바라밀이고, 내 안의 번뇌를 없애는 것이 지계바라밀이고, 어떤 유혹이나 역경에도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이 인욕바라밀이고, 나의 욕망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것이 정진바라밀이고, 마음을 늘 하나로 모아 가다듬는 것이 선정바라밀이고, 모든 생각과 분별시비를 떠나는 것이 지혜(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위의 설명은 우리가 배웠거나 알고 있던 일반적인 육바라밀의 내용과는 조금 다르지요. 보시바라밀의 경우 경전은 자신의 탐심을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듯 누군가에게 물건이나 돈을 건네는 ‘행위’가 보시바라밀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설령 누군가에게 한 푼의 돈도 건네지 않더라도 물욕과 탐심을 버리는 순간 보시바라밀은 완성됩니다. 마조스님의 재가제자인 방거사龐居士란 분은 실제로 자신의 집과 재산을 이웃에게 다 나누어주고 자신은 허름한 초가를 짓고 살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재산을 나누어준 행위가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했던 탐심 없는 마음입니다. 방거사처럼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실로 없다는 무소유無所有의 마음이야말로 보시바라밀의 핵심인 것이지요.
지계바라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볼 때 계율을 잘 지키고 위의를 갖춘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 지계바라밀의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계율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계를 어기거나 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그 마음 자체를 조복調伏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계바라밀은 꿈에서조차 계를 어기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꿈이란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나의 무의식이지요. 마음 밑바닥에 숨어있던 번뇌의 찌꺼기까지 사라져 꿈조차 청정해질 때 비로소 지계바라밀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바라밀의 핵심은 ‘행위’가 아닌 ‘마음’에 있습니다. 그 마음은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시비와 선악을 떠난 공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마음의 경계를 보여주신 스님은 참으로 많지만 저는 성철스님의 초파일 법어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요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 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은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하게 보게 됩니다.”

이 파격적인 법어가 담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육바라밀의 근본토대인 ‘반야바라밀’의 내용입니다. 설령 어떤 이가 스님의 뜻을 곡해하거나 비방하더라도 화를 내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스님의 말씀처럼 그를 적이 아닌 부처로 알아 반야의 지혜를 증장增長하면 족할 뿐입니다.

어머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바라밀의 지혜로 참된 보살의 길을 걸으시길 아들이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글 |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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