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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5)
2019년 09월 02일 (월) [조회수 : 44]
   
 

그리운 어머니.
혹시 요즘 유행하는 ‘사이다’란 말을 아시나요? 누군가의 발언이 자신의 생각과 같거나, 그것이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을 신랄하게 공격할 경우 ‘사이다’라고 부릅니다. 사이다처럼 막힌 속을 뻥 뚫어준다는 뜻이지요. 저는 이 ‘사이다’ 발언이 넘쳐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사이다는 대체로 심한 갈증이나 속이 갑갑할 때 마시듯, 사이다 발언에 환호하는 세상이 그리 건강할 리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사이다를 마시면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밍밍한 맹물이지요. 맹물은 그 무색무취로 인해 차나 국이 될 수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면서 다른 것들과 연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요. 저는 맹물이 불교의 중도와 다르지 않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불교의 중도사상은 증오를 바탕삼아 색깔을 나누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서슬 퍼런 구호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점령한 이 세상에서 특히나 귀한 의미를 지니리라 믿습니다. 


대승보살의 원願과 사홍서원

어머니, 지난번에는 보살마하살, 즉 대승보살의 사상과 실천의 토대인 공空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대승보살이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인 원願을 알아보겠습니다. 원이라고 말하니 괜히 어려워 보이지만 ‘원하는 것’, 혹은 ‘바람’을 뜻합니다. 우리는 불교라는 종교를 신행하면서 많은 원들과 만납니다. 어느 40대 보살은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 원을 지니고 있고, 어떤 50대 거사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원을 가지지요. 중생들은 각자의 근기와 욕망에 따라 수많은 원을 지니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원이 아무리 다양하다 할지라도 사실은 하나로 정리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지요. 이는 모든 생명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입니다.

하지만 『반야경』에 나타난 대승보살의 원은 우리들의 원과는 조금 다릅니다. 서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나는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겠다.’라는 원이고, 둘째는 ‘나는 반드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건지리라.’는 원이고, 셋째는 이를 토대로 ‘이 땅을 청정한 불국토로 만들겠다.’는 원입니다. 이는 보살의 서원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구절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에다가 청정불국토를 더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원은 법회나 불교행사의 마지막에 대중들이 함께 외우는 사홍서원四弘誓願과 비교해보면 비슷한 듯 또 다릅니다. 사홍서원은 불자들로서 지녀야할 네 가지 큰 원을 뜻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사실 저는 사홍서원의 네 구절을 아직까지도 정확히 외우지 못합니다. 외울 때마다 늘 순서와 내용이 헷갈리기 일쑤니까요. 이런 헷갈림은 제 머리 탓도 있겠지만, 사홍서원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항목들로 구성된 이유도 있습니다. 중생을 건지고, 불도를 이루는 것에서 이미 보살의 핵심서원인 하화중생과 상구보리가 다 말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운다는 두 구절은 불도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수행과정이라 넣어둔 것일까요. 하지만 번뇌를 다 끊는다는 것 자체가 불도를 이룬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불필요한 중복인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차라리 사홍서원 대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서원으로 간결하게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 그리하여 청정한 불국토를 꼭 이루오리다.

하화중생과 상구보리에 보살의 사회적 의식과 실천의 확장인 청정 불국토를 더해서 구성하자는 것이지요. 이것은 보살사상의 근본이 되는 『반야경』의 핵심적인 세 가지 서원으로 되돌아가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어머니, 보살의 서원 가운데 첫 번째인 상구보리, 즉 위로 깨달음을 구한다는 의미는 지난 시간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왜냐면 보살이 추구하는 깨달음이 바로 공空의 체득이자 실천이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두 번째 서원인 하화중생, 즉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중심에 두고 상구보리와의 관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보통 상구보리는 자리自利라 부르고, 하화중생은 이타利他라고 합니다. 보살의 서원은 한 마디로 자리이타의 서원입니다. 자리는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고, 이타는 남을 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자리이타’라는 말은 꽤 논쟁적인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자리이타에 관한 논쟁은 흔히 자신의 깨달음을 먼저 이루어야 진정한 이타가 가능한가, 아니면 이타적 보살행을 먼저 해야 자신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가의 문제로 집약됩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논쟁이지요. 사실 이러한 논쟁은 아무리 고상하고 어려운 용어를 쓰더라도 다 허깨비 같은 말장난일 뿐입니다. 이는 불교의 중도中道인 불일불이不一不二를 두고 불일不一과 불이不二,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선이고 중요하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불교란 모순되고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를 연기적으로 결합해 통찰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자리이타는 말 그대로 자리이타입니다. 자리이타가 곧 중도이자 공의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살의 서원을 자리와 이타를 나누고 있지만 그것이 둘이 아닌 경계로 보아야지만 상구보리는 물론 하화중생이 지닌 의미까지 온전히 살려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반야경』에는 보살의 서른 가지 서원이 나옵니다. 꽤 많은 수의 서원이지요. 대승불교에서 서원은 보살이 반드시 지녀야하는 필수항목입니다. 원이 없는 보살이란 존재할 수도, 존재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른 가지 서원 가운데 첫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중생이 헐벗고 굶주려 받는 것을 보면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보시바라밀을 행하고, 내가 무상정등정각을 얻게 되면 이 땅의 중생들이 배고픔이나 헐벗음에서 벗어나 풍족하고 윤택한 생활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첫 번째 서원을 살펴보면 하화중생, 상구보리, 그리고 청정불국토의 서원이 모두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서원이 별개가 아니란 뜻입니다. 얼핏 보아선 보살이 중생을 먼저 구제하고, 그리고 이후에 깨달음을 이루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보살이 중생을 구하기 위해 ‘보시바라밀’을 행한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시바라밀’은 우리가 아는 ‘보시’와 같은 의미일까요?
대승보살의 실천수행법인 육바라밀에 관해선 다음에 다루겠지만, 보시바라밀은 보시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보시가 보살의 바라밀 행 가운데 하나인 보시바라밀이 되기 위해선 공을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불전에 돈이나 공양물을 올려놓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빌거나, 어려운 이를 돕고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은 보시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행위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보시는 선업을 쌓고 좋은 과보를 일으키는 행위일진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보시바라밀이 될 수 없습니다. 보시가 보시바라밀이 되기 위해서는 주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고, 건네는 물건도 없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여야 합니다. 무주상보시는 공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보살이 중생을 구제한 다음에야 비로소 공에 대한  깨달음을 이룬다고 생각한다면 경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대승보살의 사상과 실천의 근거는 공입니다. 나도 공하고, 제법도 공하다는 ‘아공법공’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왜 나와 남을 굳이 구분하고 있을까요. ‘자타일시성불도’에서 ‘자타’라는 말도 그러합니다. 모든 것이 공하니 나도 없고, 남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진리의 측면에서 보자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엔 엄연히 나와 남이라는 뚜렷한 분별이 있지요. 이런 분별심이 가득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선 방편으로 나와 남을 나누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조금도 다가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중생의 욕망을 제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성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이성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돈을 쫓는 사람에겐 돈을 주어서 결국은 모든 것이 공하다는 가르침으로 이끄는 것이지요. 이를 불교에서는 중생의 환상을 이용해 그 환상을 제거하는 선교방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보살의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란 두 가지 원은 중생을 이끄는 선교방편으로 설해진 것일 뿐 별개의 개념으로 분리해서 이해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불국정토도 이와 같습니다.
어머니, 이제 계절이 가을의 문턱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늘 기도하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선선한 계절을 맞이하시길 아들이 기원합니다.

글 |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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