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7 화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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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라는 뱀의 머리를 잡는 법
2019년 09월 02일 (월) [조회수 : 71]
   
 

한 그릇

중국 당나라 때 마조馬祖 709∼788 스님이 있었습니다. 육조 혜능慧能 638~713과 남악 회양懷讓 677∼744 의 뒤를 이어 ‘8대 조사’로 칭송 받는 인물입니다.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는 불가의 유명한 가르침을 던진 분이기도 합니다. 하루는 마조 스님이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부좌를 틀고서 침묵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마조의 모습을 지나가던 스승 회양 스님이 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좌선을 해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가?”
마조 스님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수좌의 대답이 참 결기에 차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회양 스님은 칭찬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글쎄, 암자 앞으로 가더니 벽돌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마조 스님 앞에서 그걸 ‘쓱싹, 쓱싹’ 갈기 시작했습니다. 마조 스님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벽돌을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회양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네”,“아니 스님!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 스님은 곧장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회양 스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자네는 수레를 때려야 옳겠는가. 아니면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회양 스님은 좌선하던 마조의 허점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수레를 때리지 말고, 소를 때리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야 수레가 굴러 갈 테니 말입니다. 그럼 ‘수레’는 무엇이고, ‘소’는 무엇일까요. 불교 신자라고, 수행자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지금 수레를 때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소를 때리고 있을까요?
두 그릇

이웃종교의 성직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저는 이런 물음을 던졌습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짧은 답이 돌아왔습니다. “종교는 뱀이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들 종교는 마음을 치유하는 약이고, 삶의 지혜를 안겨주는 귀한 선물이라고 보니까요. “왜 종교가 뱀입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뱀을 잡을 때 어디를 잡아야 합니까? 허리를 잡나요? 꼬리를 잡나요? 아닙니다. 머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물리지 않죠. 만약 허리나 꼬리를 잡는다면 되려 뱀에게 물리고 맙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교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집니다. 또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따집니다. 그러나 종교의 어디를 잡고 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머리를 잡고 있는지, 꼬리를 잡고 있는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한 성직자는 “종교인이라면 그걸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나는 과연 뱀의 어디를 잡고 있는가.’
세 그릇

그렇습니다. 종교는 ‘뱀’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잡아야 합니다. ‘나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똬리를 틀고 있는 저 뱀의 머리가 어디인가.’ 그걸 오차 없이, 정확하게 찾아내야 합니다. 불교만 그런 게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를 낚아채지 않으면 오히려 종교에게 물리고 말 테니까요.
회양과 마조의 일화도 결국 ‘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좌선한 채 침묵 속에만 앉아 있는 마조를 향해 회양 스님은 이렇게 물은 겁니다. “너는 지금 뱀의 머리를 잡고 있느냐, 아니면 뱀의 꼬리를 잡고 있느냐.” 왜 그랬을까요. 이 선문답 일화 속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답은 뻔히 보입니다. 마조의 좌선이 ‘좌선의 본질적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마조의 수행이 ‘수행의 본질적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 좌선의 본질적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건 ‘깨달음’입니다. 그럼 깨달음은 어떨 때 오는 걸까요. 간단합니다. 세상의 모든 깨달음은 ‘나의 착각’이 무너질 때 옵니다. 가령 밤새도록 뱀인 줄 알고서 두려움에 떨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새끼줄이었다는 원효의 깨달음도 ‘나의 착각’ ‘착각의 잣대’가 무너질 때 왔습니다. 두려움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감정이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주인공이 만드는 것임을 깨친 겁니다.
‘평상심이 도’라는 마조의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마음을 둘로 쪼갭니다.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걸 ‘도道’라고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쁜 마음은 피하고 싶고, 좋은 마음은 틀어쥐고 싶습니다. 그래서 좋은 마음도 나쁜 마음도 평상심이 되질 못합니다. 그럼 어떡해야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마조가 말하는 평상심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도가 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도 ‘나의 착각’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게 뭐냐고요?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나의 잣대’입니다. 그게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마음도 ‘그냥 마음’이 되고, 나쁜 마음도 ‘그냥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평상심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평상심이 도’가 됩니다.
네 그릇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아니 왜 ‘나의 잣대’가 꼭 무너져야 하는가?” “‘나의 잣대’가 무너져야만 평상심이 드러나는 까닭은 뭔가?”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그런데도 부처로 살지 못합니다. 내가 틀어쥔 착각과 고집과 잣대를 똘똘 뭉쳐 ‘에고’를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걸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부처다’가 아니고 ‘나는 에고다’ 다시 말해 ‘나는 중생이다’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럼 중생이 다시 부처가 되려면 어떡하면 될까요. 그렇습니다. 중생의 착각을 부수면 됩니다. 그럼 저절로 부처로 돌아갑니다. 본래 부처니까요. 마조의 평상심도 똑같습니다.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에고의 잣대’를 부수면 됩니다. 그럼 세상의 모든 마음이 ‘그냥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게 평상심입니다.
이제 어렴풋이 보입니다. 회양 스님이 왜 마조를 꾸짖었는지 말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선문답 일화에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마조의 좌선에는 ‘잣대의 무너짐’이 없었겠지요. ‘착각의 잣대’가 무너지지 않으면 수행의 바퀴는 결코 굴러가지 않습니다. 마조는 그저 가부좌한 채 고요와 침묵만 맛보며 앉아있지 않았을까요. 저는 회양 스님이 그걸 꾸짖었으리라 봅니다. 거기에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없다면 수행의 바퀴가 굴러갈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좌선을 하느냐, 행선을 하느냐, 호흡을 하느냐, 염불을 하느냐 하는 방법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핵심은 내 안에 있는 ‘착각의 잣대’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그게 종교라는 뱀의 머리를 잡는 법입니다. 
종교는 그냥 뱀이 아닙니다. 맹독을 품은 독사입니다. 뱀 중의 뱀입니다. 왜냐고요? 머리를 잡을 땐 ‘약’이 되지만, 꼬리를 잡을 땐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생명을 죽이기도 하니까요. 일반 신자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성직자도 마찬가지죠. 종교에 물린 스님, 종교에 물린 목사, 종교에 물린 신부도 우리는 종종 보니까요. 그러니 늘 살펴야죠. 내가 잡은 곳은 어디인가. 뱀의 꼬리인가, 허리인가, 아니면 머리인가.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 저서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생각의 씨앗을 심다』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글 |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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