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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속임수
원각경 보안보살장의 말씀에서(9)
2019년 09월 02일 (월) [조회수 : 30]
   
 

한참을 깔깔거리던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을 이어가셨다.
“주변을 돌아보면 없던 모양새[相]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그 모양새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또 끊임없이 변화하고, 언젠가는 당신이 주목하던 모양새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기능[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현상을 늘 마주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전에 없던 모양새와 기능이 나타나면 이전과는 다른 ‘이름[名]’을 붙입니다. 실과 다른 모양새와 기능을 가지게 되면 ‘손수건’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면밀히 관찰해 보면, 모양새와 기능은 인연 따라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어느 특정한 시점부터 이전과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부처님께서 탁자에 놓여있던 목탁을 들어 보이셨다.
“동그스름하게 생긴 이것을 당신은 무엇이라 부릅니까?”
“목탁이라 부릅니다.”
“이 목탁은 무엇으로 만듭니까?”
“나무토막을 깎아 만들지요.”
“지금 우리 앞에서 솜씨 좋은 장인이 조각칼을 들고 나무토막을 깎아 목탁을 만든다고 상상해 봅시다. 당신은 나무토막에서 목탁이 생기는 순간을 지목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지요. 장인이 조각칼을 놀려 동그스름한 모양새를 만들고, 또 속을 파내 소리가 나는 시점부터가 목탁이겠지요.”
“그럼, 장인이 목탁을 만드는 과정을 열 사람이 지켜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열 사람이 동시에 ‘지금부터가 목탁이다.’라고 외칠까요?”

그가 머뭇거리자 부처님께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말씀하셨다.
“아마 ‘지금부터 목탁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열이면 열 모두 다를 겁니다. 누군가 ‘이제 목탁이다’라고 할 때, 누군가는 ‘아직은 목탁이라 할 수 없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 봅시다. 만약 ‘지금부터 목탁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열 사람 모두 일치한다면, ‘목탁’이 생겨나는 순간은 관찰자와 상관없이 외부의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열이면 열 다 다릅니다. 이 얘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관찰자와 상관없이 ‘나무토막’과 ‘목탁’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나무토막’과 ‘목탁’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즉 관찰자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목탁’이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철학적인 말씀이시라 그런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관찰자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목탁이 없다면 지금 제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제게는 꼭 언어를 부정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부처님께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셨다.
“제가 성급했나 봅니다. 그럼, 조금 다르게 설명해 보지요.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어디가 나옵니까?”
“과천이 나오지요.”
“좋습니다. 서울과 과천은 행정구역이 엄연히 다릅니다. 만약 서울과 다른 과천, 과천과 다른 서울이 외부에 실재한다면 누구라도 ‘여기는 과천’ ‘여기는 서울’이라며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 경계지점에 직접 가보면 뚜렷한 경계선이 없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서울’과 ‘과천’이 분명히 다르지만 정작 그곳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산세와 건물, 풍토와 식생 등이 서로 다르겠지요. 하지만 그런 차이를 기준으로 서울과 과천을 구분한다면, 서울 안에서 다시 수많은 과천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세와 건물, 풍토와 식생 등의 차이는 서울과 과천의 경계지점 못지않게 서울 안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서울과 과천은 외부에 실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사람들이 편의에 따라 임의로 설정한 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는 ‘선’은 외부에 이미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긋는 것입니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사람이 선을 긋는 것이지 밖에 선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부처님도 따라 환하게 웃으셨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그럼, 그 예를 바탕으로 적용대상을 확대해 보겠습니다. 서울과 과천이 편의를 위해 임시로 구분한 것이라면, 나무토막과 목탁 역시 편의를 위해 임시로 구분한 표현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부처님.”
“어디 서울과 과천, 나무토막과 목탁뿐이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이 몽땅 편의를 위해 임시로 사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가 무릎을 쳤다.
“그렇습니다. 부처님.”
부처님이 잠시 말씀을 멈추고 가만히 그의 눈빛을 바라보셨다.
“앞서 ‘언어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린다.’고 하셨는데, 저는 ‘언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언어에 갇혀 꼼짝 못하는 것을 풀어주려는 것뿐입니다. 언어란 분명 사회 구성원들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편리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그 도구는 편의를 위해 서로 합의하고 설정하는 것이지, 움직일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갑자기 목청을 높이셨다.
“당신은 밥을 무엇으로 먹습니까?”
그가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숟가락으로 먹지요.”
“그럼, 숟가락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 없나요?”
“숟가락 없이도 얼마든지 밥을 먹을 수 있지요. 젓가락도 있고, 급하면 손으로 집어먹어도 되고요.”
“바로 그것입니다. 언어에 갇힌 사람은 숟가락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등이 있다.

글 | 성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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