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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4)
2019년 08월 02일 (금) [조회수 : 49]
   
 

그리운 어머니.
경남의 거창고등학교에는 오래전부터 직업선택의 십계명이란 것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입니다. 한마디로 돈이 안 되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상식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계명은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등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홉 번째와 열 번째 계명입니다.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저는 이 열 가지 계명에서 부처님의 출가와 깨달음, 그리고 중생교화를 위한 행적을 읽습니다. 저같이 무늬만 불자인 사람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계명이지요. 우리는 부처님처럼 살겠다고 맹세하고선 정작 현실에선 부처님의 길과 반대로만 가는 것은 아닌지 거창고등학교 십계명을 통해 찬찬히 성찰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대승보살의 출발, 반야경

어머니, 혹시 보살이란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대승경전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등만 펼치더라도 보살이란 말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아마 해인사 장경각에 주야장천 머물며 팔만사천 경판을 샅샅이 뒤지더라도 보살이란 말이 없는 대승경전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보살불교’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나 부파불교와는 다른 대승불교만의 보살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반야경』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반야경』은 우리에게 친숙한 『반야심경』과 이름이 비슷해 혼동하기 쉽지만 다른 경전입니다. 대승불교의 경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성립된 『반야경』의 원제는 『마하반야바라밀경』으로 대품大品과 소품小品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대품은 『이만오천송반야』라고도 하는데 게송이 25,000개가 담겼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소품은 『팔천송반야』라고 부르지요. 짐작하시듯 게송 8,000개가 있는 반야경이란 뜻이지요. 대품과 소품은 내용상 큰 차이는 없고, 다만 분량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대품과 소품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나왔을까요? 그건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대품이 먼저 나왔다가 이후에 소품으로 압축된 것일 수도 있고, 소품으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살이 붙은 것일 수도 있지요. 아무튼 이 『반야경』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대승보살의 의미가 여기서 확립되어 각종 대승경전으로 퍼지기 때문에 대승보살의 발원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야경』에서는 보살을 ‘보살마하살’이란 명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마하살’은 마하살타의 줄임말입니다. ‘마하’는 ‘위대하다’라는 뜻이고, ‘살타’는 ‘생명을 지닌 유정’을 뜻하지요. 그러니 보살마하살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위대한 유정이란 뜻입니다. 대품 『반야경』에선 이에 관한 수보리와 부처님의 문답이 등장합니다.

수보리 ; 세존이시여, 무슨 이유로 보살마하살이라고 합니까?
세존 ; 이 보살은 반드시 번뇌를 벗어나 깨달음을 얻을 이들의 우두머리이기에 마하살이라고 한다.     

왜 보살이란 말 뒤에 굳이 마하살을 덧붙이는지 짐작하셨는지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듯, 『반야경』에서 보살마하살이란 말을 꺼낸 이유는 대승불교의 보살은 기존에 유통되던 보살의 개념과는 다르다는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섭니다. 마치 ‘응, 우리의 보살은 일반적인 보살이 아니고 특별한 마하살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니까 『반야경』에서 말하는 보살의 핵심은 마하살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수보리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우두머리’라는 대답은 모호합니다. 그래서 『반야경』에선 부처님의 10대 제자들 가운데 몇 명을 등장시켜 마하살의 의미를 상세히 푸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사리불이 나서서 보살이 아견我見, 인견人見, 수견壽見 등의 삿된 견해를 모두 끊어내는 설법을 하기에 마하살이라고 한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아견, 인견, 수견은 바로 『금강경』에 등장하는 아상, 인상, 수자상과 같은 말입니다. 『금강경』의 핵심 사상은 무엇인가요? 공空이지요. 『금강경』에는 ‘공’이란 글자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공사상을 담고 있는 대표적 경전임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리불의 답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보살마하살은 다른 보살과 달리 공空을 설하기에 마하살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사리불의 견해를 들은 수보리가 다시 등장해서 자신의 의견을 덧붙입니다. 보살마하살은 성문이나 연각과는 달리 깨달음에 대한 집착조차 없기에 마하살이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공’이라고 설법한다고 보살마하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이란 가르침에서조차 자유로워야 보살마하살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지요?

어머니,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떤 것에 꽂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물건에 꽂히기도 하고, 어떤 드라마에 꽂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 꽂히기도 합니다. 꽂힌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집착을 한다는 말이고, 집착은 번뇌를 불러옵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집착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교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특정 경전, 혹은 깨달음에 꽂히는 경우는 참 판단하기가 애매합니다. 보통 불교계에선 이런 걸 신심信心이라고 장려하는 경우가 많지요. 물론 신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웃종교인과 불화하고 타인의 견해를 배척하면서 삶이 점점 경직되어간다면 그건 신심도 아니고 불자도 아니겠지요. 성철스님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불교보다 더 나은 가르침이 있다면 나는 당장 불교를 버리고 그 가르침을 따르겠다.”

성철스님의 말씀은 불교의 가르침이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반어법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 말에서 제도로서의 불교와 교리라는 틀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사로서의 자유분방함도 읽을 수 있습니다.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불교의 기치를 드높인 선사다운 말이지요. 선사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철저히 공空을 바탕으로 삼아 기존의 형식화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만 도리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철스님의 “내 말에 속지마라.”라는 가르침 또한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뭔가를 하나 가르쳐주면 아이는 그걸 고집스럽게 지킵니다. 아이에게 ‘누가 와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면 안 돼.’라고 말하고 잠시 외출한 엄마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아이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지혜와 판단력이 부족한 아이는 엄마의 말을 너무 충실히 따르다보니 도리어 자신을 지켜줄 엄마를 집 밖으로 몰아내고 있는 셈이지요.

공과 깨달음에 대한 집착도 아이와 비슷한 소견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런 걸 불교에서는 공병空病이라고 하지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공을 가르쳤더니, 도리어 공과 깨달음에 매달리는 병을 말합니다. 이런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공조차도 공하다는 ‘공공空空’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이런 이들을 위해 “깨달음의 지혜도, 그 지혜의 얻음도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금강경』에서는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자칫 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위험한 이야기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경전들은 하나같이 성문과 연각은 대승의 가르침을 만나면 두려움과 의심으로 인해 따르고 행하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지요. 대승의 불법은 오직 보살마하살의 그릇을 지닌 이들을 위한 가르침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는 정녕 선택받은 상근기만을 위한 가르침인 것일까요? 그래서 대승불교를 믿는 이는 수승하고 대승불법을 외면하는 이는 하열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위에서 사례를 든 아이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되겠지요. 대승불교의 공사상에 따르면 우리가 실제로 보살마하살의 근기를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는 대승불교와 보살의 길로 나아가는데 있어 조금도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한 근기 또한 실체가 없는 공이기 때문입니다. 대승경전을 읽으면서 무상정등정각이란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내되, 그것에 집착하고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으로 실천하는 순간 보살마하살이 됩니다. 대승경전이 보살마하살과 공을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가르침인 것이지요. 오늘은 『반야경』을 통해 대승불교의 보살이란 공에 대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종국엔 그 공이란 가르침에 집착하지 않는 보살마하살을 뜻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니, 날씨가 참 덥습니다. 늘 청량하고 안락한 마음으로 올 여름을 견뎌내시길 아들이 기원합니다.

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글 |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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