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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因緣의 물결
원각경 보안보살장의 말씀에서(8)
2019년 08월 02일 (금) [조회수 : 37]
   
 

그랬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외치면서 얼마나 놀라고 호들갑을 떨었던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저러해야 마땅한데 왜 이럴까~”라는 말은 또 얼마나 많이 했던가?
창공을 나는 새에게도 길이라는 것이 필요할까? 마치 광활한 하늘에 선을 그어놓고 새에게 그 길을 따라 날도록 강요하는 사람처럼, 나는 내가 그어놓은 선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다그치고 강제했던 것이다.
그렇다! 슬픔, 우울, 불안, 분노, 공포 등 결코 유쾌하지 않은 감정들을 동반하는 허무虛無와 강박强迫의 뿌리는 ‘그들’이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나의 어리석음 탓이었다. 
나의 속내를 아시기라도 하듯, 부처님께서 잔잔한 미소를 보이셨다.
“저는 당신에게 기존과 다른 특별한 신념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모르는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거나 특별한 목표를 설정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 지금 눈앞에서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 그 사실을 새삼 자각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권유할 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물었다.
“부처님,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인정하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반복하셨는데, 그 사실이란 것이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잘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또렷한 음성으로 힘주어 말씀하셨다.
“바로 인연因緣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현상은 끊임없는 인연因緣의 물결일 뿐입니다. ‘나’라고 부르고 있는 이것도, ‘너’라고 부르고 있는 그것도, ‘무엇’이라 부르고 있는 저것도, 나와 너와 무엇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어떤 일’도 몽땅 인연의 물결일 뿐입니다. 인연의 물결일 뿐이라는 것은 곧 ‘나’ ‘너’ ‘무엇’이라고 구분하고 따로따로 이름을 붙일만한 실체가 없다는 뜻이고, 나와 너와 무엇 사이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저에게는 ‘인연因緣’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그 의도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셨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저에게 익숙한 방식이 당신에겐 낯선 방식이란 걸 고려하지 못했군요. 미안합니다. 다른 용어들을 사용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의 질문을 유치하다 생각지 말고,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 대답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 탁자에 놓인 손수건을 들어 보이셨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손수건입니다.”
“이 손수건은 실타래를 누군가가 씨줄 날줄로 엮어야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손수건과 실타래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손수건과 사람의 손놀림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다르다면 곧 ‘손수건이 아닌 것’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지요. 그렇다면 ‘손수건’은 ‘손수건이 아닌 것’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손수건’이 의지하고 있는 그 ‘손수건 아닌 것’은 최소 두 가지 이상이어야 합니다. 이를 ‘인因’과 ‘연緣’이라 칭합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가 물었다.
“꼭 두 가지 이상이어야 합니까? 하나일 수는 없는 건가요?”
“‘손수건’이 의지하고 있는 ‘손수건 아닌 것’이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만으로는 변화變化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로도 가능하다면 ‘실타래’만으로 ‘손수건’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의 ‘손수건 아닌 것’에서 ‘손수건’이 나왔다면 ‘손수건 아닌 것’이 ‘손수건’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건 같은 것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또 만약 ‘손수건 아닌 것’이 곧 ‘손수건’이라면 ‘생긴다.’는 표현을 쓸 수 없습니다. ‘A에서 A가 생겼다’는 말처럼 허황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다시 말을 이어가겠습니다. ‘손수건’이라는 결과물[果]은 두 가지 이상의 ‘손수건 아닌 것’ 즉 인과 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因과 연緣이 없으면 과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동의하십니까?”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한참을 깔깔대며 웃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당연한 일을 두고 착각을 일으킵니다.”
“어떤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이죠?”
“인연 따라 나타난 결과물에 꼭 인연과 다른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이해되지 않으시나 봅니다. 찬찬히 설명해 보지요. 사람이 실타래를 씨줄 날줄로 정리해 재빠른 손놀림으로 기존에 없던 모양새로 엮으면, 우리는 그것을 두고 ‘손수건이 생겼다’고 표현합니다. 또 사람이 손수건에서 씨줄 날줄을 하나씩 풀어 가지런한 실타래로 정리하면, 우리는 그것을 두고 ‘손수건이 없어졌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어간에서 기존에 없던 특별한 무언가가 생기고, 기존에 있던 특별한 무언가가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내가 반론을 제기했다.
“없던 손수건이 나타났으니 생긴 것[生]이 아닙니까? 있던 손수건이 사라졌으니 없어진 것[滅] 아닙니까? 그걸 부정하는 건 상식을 파괴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상식에 반하는 별난 생각을 하고 별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식을 찬찬히 점검해 보라는 것뿐입니다. 없다가 나타난 ‘손수건’, 있다가 사라진 ‘손수건’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손수건을 짠 실타래를 저울에 올려놓고, 또 손수건을 저울에 올려놓고, 또 손수건을 푼 실타래를 저울에 올려놓으면 그 무게가 동일합니다. 만약 실타래에서 생겨난 ‘손수건’에 실체實體가 있다면 손수건 무게는 실타래 무게에서 단 몇 g이라도 늘어나야 마땅합니다. 없어진 ‘손수건’에 실체가 있다면 손수건을 푼 실타래 무게는 손수건 무게에서 단 몇 g이라도 줄어야 마땅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내가 항변하듯 말했다.
“실들은 선의 형태이지만 손수건은 가로와 세로가 있는 면의 형태입니다. 또 손수건으로는 얼굴을 닦을 수도 있고 햇볕을 가릴 수도 있지만 실타래에는 그런 기능들이 없습니다. 질량에는 변화가 없지만 실타래일 때는 없던 모양과 기능이 생기고, 손수건에 있던 모양과 기능이 사라지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환하게 웃으셨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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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등이 있다.

글 | 성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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