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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3)
2019년 07월 02일 (화) [조회수 : 42]

그리운 어머니.
얼마 전 『일일시호일』이란 일본영화를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즉 ‘날마다 좋은 날’은 운문선사의 말로 유명하지요. 영화는 20살에 우연히 다도茶道를 접한 여성이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다도를 꾸준히 이어가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도를 가르치는 방에는 붓글씨로 ‘日日是好日’이라 쓴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주인공은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감을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곡절을 여러 번 겪은 사십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 글자가 품은 뜻을 온몸으로 깨우치며 영화가 끝이 나죠. 선불교의 깨달음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선어록에선 스승의 말에 제자가 단박에 깨달았다고 나오지만, 그것은 그전에 제자가 끊임없는 수행과 고민을 통해 근기가 무르익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우리는 어록에서 그 결과만 보는 것이지요. 영화를 보는 내내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일상일지라도 그 과정 자체를 ‘날마다 좋은 날’이라 소중히 여길 수만 있다면 인생의 참된 깨달음은 자연스레 우리를 찾아올 것만 같았습니다.


보살과 타인

어머니, 지난 시간 초기불전의 보살과 부파불교 보살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초기불전에서 보살이란 말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수행자 시절을 지칭했지요. 시간이 흐른 뒤 부파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 일반으로 보살의 의미를 확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승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보살의 개념이 이미 부파불교에서 싹트고 있었지요. 결국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의 토양위에서 자라난 것이고, 부파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에서 확장된 것이란 사실을 망각해선 안 됩니다. 다양한 불교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 일각에서는 선불교는 ‘참 나眞我’를 말하기에 불교의 근본교설인 무아無我를 배반하고 있다는 둥,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니니 가치가 없다는 둥, 부파불교는 유치하고 이기적인 가르침이라는 둥,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헐뜯어서 불자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어머니, 여기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는 근본 원인은 무명無明입니다. 불교에 대한 지혜와 공부가 부족해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지요. 예전에 한 불자가 기독교의 교리가 독선적이고 편협하다고 뭉뚱그려 비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불자이니 당연히 맞장구를 쳐주리라 생각했나 봅니다. 저는 묵묵히 듣고 나서 물었습니다. “혹시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거나 공부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상대는 당황해하면서 “불자가 왜 그딴 걸 공부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처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다른 가르침을 쉽사리 비방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배우고 접해온 가르침이 아니라고, 혹은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다른 불교의 수행법이나 교리를 하찮게 여기는 것은 불교적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때 일본 불교학계에서는 비판불교라는 것이 성행했는데 그들은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고, 불성을 말하는 것 자체가 반불교적 실체론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우물 안에서 하늘 전체를 보았다고 착각한 결과입니다.

불교의 진정한 의미는 각자의 신념과 그릇에 따라 자신의 자리에서 수행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데서 나오는 것이지, 자신이 믿는 가르침이나 수행법이 다른 가르침보다 더 윗길이라고 뽐내고 고집을 피우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2,600년이란 역사 속에서 지역과 근기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해온 것입니다. 어머니, 저는 불교의 핵심적 가치는 하나를 획일적으로 고집하는 대신 각종의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펼쳐놓은 다양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보살이란 존재는 남을 곧 나로 삼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나와 남을 가르고 남을 배제하는 태도 속에서 보살은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보살은 중생을 제도함으로써 비심悲心을 성취한다. 남을 고통에서 꺼냄으로서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다.”
“보살은 비록 자신이 고통스럽더라도 남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부지런히 구하며, 남의 괴로움을 영원히 소멸시키려 애쓴다. 그것은 남을 자기로 여기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의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은 위에서 보듯 보살을 비심悲心, 즉 자비의 마음을 지닌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 자비심을 구체적으로 풀면 곧 남을 나와 다르지 않게 여기는 마음인 것이죠. 『구사론』은 비록 부파불교의 논서지만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대승보살의 핵심사상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을 나와 다르지 않게 여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이런 존재로는 언뜻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고통스럽거나 위험에 처해도 자식의 안위와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존재지요. 그래서 보살을 중생의 어머니에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나와 남의 관계는 아닙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자식은 또 다른 나이지요. 따라서 어머니는 내 자식에게는 한없는 애정을 쏟더라도 남의 자식에게까지 평등한 애정을 베풀 순 없습니다. 그러나 보살은 혈육의 정으로 엮이지 않은 모든 중생에게 동일한 자비의 마음을 냅니다. 그렇다면 중생들은 어떻게 해야 타인 모두를 자신의 자식으로 여기는 보살의 자비심과 평등심이 생겨날까요. 이 문제는 대승불교의 보살을 말하면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진실보살

부파불교에서 보살의 개념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 일반으로 확장되기는 했지만 사실 ‘그림의 떡’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보살은 실질적으로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명칭이 아닌 것이지요.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 ‘진실보살’입니다. 『비바사론』은 보살에 대해 다음처럼 말합니다.
“보살은 비록 삼아승지겁을 지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행과 고행을 다 닦았다하더라도 묘상업妙相業을 닦고 익히지 못했다면 ‘나는 보살이다.’라고 말해선 안 된다.”

묘상업이란 우리가 법당에서 보는 부처님의 32가지 모습과 그것을 더 세분화한 80가지 신체적 특징을 말합니다. 이마의 흰 털, 어깨까지 늘어진 귀, 목의 세 가닥 주름 등 부처님의 용모를 지닐 수 있도록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파불교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지혜와 수행, 그리고 복덕을 갖춘 용모를 지니지 못하면 감히 보살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지요. 진실보살이 되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좋은 일을 성취합니다.

1. 지옥, 아귀, 축생의 악취惡趣가 아닌 항상 천상이나 인간계에서 태어난다.
2. 가난하고 천한 집안이 아니라 항상 귀족, 거부, 장자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3. 항상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다.
4. 항상 선천적 기형이나 장애가 없는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난다.
5. 항상 많이 듣고 배워서 연기법을 믿고 깨달음의 토대로 삼는다.

어머니, 저는 여기서 부파불교가 성행했던 당시 인도의 시대상을 읽습니다. 현실이 열악하다보니 석가모니의 실제 탄생을 토대로 좋은 집안에서 남자로 태어나서 건강한 모습으로 수행을 하는 이상적 보살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게 꼭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돌려 생각해보면 가난한 집안에서 여자로 태어나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은 보살의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되기 십상입니다. 보살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일부 대승경전에도 스며들어가 여성의 성불을 배제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법화경』에서는 여성이 성불을 하려면 다음 생에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 우리가 보살에 대해 공부한 첫 시간에 대승불교의 보살은 이러한 성별이나 사회적 신분, 신체적 조건에 구애됨이 없다는 것을 『유마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따라서 여성과 장애인, 그리고 가난한 이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하는 보살상을 진리라고 강변하면서 오늘날에도 굳이 적용하려 드는 이가 있다면 불교를 떠나 시대착오적이라는 사회적 비난을 면할 수 없겠지요. 『화엄경』에서는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유녀遊女 바수밀다가 선재동자의 선지식善知識으로 등장하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은 공통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이제 보살의 개념에 대한 이해의 토대가 어느 정도 갖추어졌으니 다음시간에는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머니, 늘 건강하고, 건강하고, 건강하시길 아들이 기원합니다.

글 |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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