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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2)
2019년 06월 01일 (토) [조회수 : 109]

그리운 어머니.

혹시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요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생활방식입니다. 미니멀 라이프란 말 그대로 삶을 최소화해서 꾸리는 것을 말합니다. 미니멀 라이프의 시작은 보통 쓰지 않는 물건을 과감하게 처분하고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지 않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런 행동은 인간관계나 삶 자체를 간결하게 유지하려는 태도로 확장되기 마련이죠. 결국 버리고 비워냄으로써 반듯해지고 정갈해지려는 것입니다. 사실 덜 가질수록 더 자유로워지는 지혜는 불교의 오랜 가르침이었습니다. 옷 몇 벌과 발우 하나만 바랑에 담으면 어디든 떠날 수 있었던 예전 스님들의 삶은 이를 잘 말해줍니다. 결국 불교의 수행이란 물질적, 정신적 짐을 매일매일 덜어내는 일이겠지요. 그럴 때에만 운문선사가 말한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보살의 어원

어머니, 오늘은 보살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서 해보겠습니다. 보살이란 친숙한 말은 그 뜻을 살피기 시작하면 의외로 깊고 거대한 의미를 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는 마치 시간과 비슷하지요. 누구나 시간을 말하고 시간에 따라 살아가지만, 만약 누군가 시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십상인 것과 같습니다. 보살은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 핵심 가르침이 담긴 곳간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그러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보살의 뜻만 이해하더라도 불교의 가르침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보살(菩薩)은 범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한자로 빌려 쓴 말입니다. 보디사트바의 정확한 음차는 보리살타(菩提薩埵)지만, 오래전부터 ‘보살’이라고 줄여서 쓰거나 불러왔습니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뜻하는 ‘보디(bodhi)’와 생명이 있는 존재를 말하는 ‘사트바(sattva)’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래서 보디사트바의 의미를 담아 ‘각유정(覺有情)’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머니, 각유정이 무슨 뜻일까요? 이미 깨달은 유정이란 뜻일까요, 아니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란 뜻일까요? 깨달음을 이룬 자와 깨달음을 향해가는 자는 분명 다릅니다. 깨달음과 유정을 어떤 관계로 읽느냐에 따라서 보살의 뜻은 천양지차로 갈립니다. 여기에 하나의 해석을 더할 수 있습니다. 보살을 깨달음이 예정된 유정으로 읽는 경우입니다. 불전을 읽다보면 부처님이 신심이 있는 불자에게 수기(受記)를 주었다란 구절이 자주 등장합니다. 수기(受記)란 내세에 부처가 되리라는 확증으로 부처님이 성불(成佛)을 보증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보살을 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아 다음 생에 성불이 예정된 이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에게서 수기를 받은 이는 깨달은 이일까요, 아니면 깨닫지 못한 중생일까요? 분명 현재를 기준으로하면 깨닫지 못한 이이지만, 앞으로 부처가 될 것이 확실하니 욕망에 허덕이며 기약 없이 윤회의 굴레를 도는 다른 중생들과 함께 묶기에 애매합니다.
이처럼 보살은 다양한 해석의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기불전에 등장하는 보살이란 용어에서부터 부파불교와 대승경전에 나오는 보살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보살이 품고 있는 다양한 불교적 의미에 다가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초기불전의 보살

초기불전에는 “비바시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기 전 보살이었을 때”라는 구절이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비바시(毘婆尸) 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시기 전 중생을 제도했다는 과거세의 여섯 부처님 가운데 첫 번째 부처님입니다. 어머니, 이전에 십이연기를 공부하면서 “붓다가 황무지를 헤매다가 옛 선인(옛 부처)들이 자취인 팔정도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서 사성제란 오래된 도시를 발견한 후, 십이연기를 통해 이 오래된 도시를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새롭게 재건했다.”라는 경전의 비유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옛 부처가 바로 과거의 여섯 부처님인 것이지요. 과거 여섯 부처님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합쳐서 과거칠불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칠불에게 보살이란 말을 붙이는 것은 부처님이 되기 전 수행자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과거칠불 가운데 실존한 것으로 확인된 부처님은 석가모니 한 분뿐이니 결국 보살이란 말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각하기 이전의 모습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불전문학인 『자타카』, 혹은 『본생경』에선 석가모니의 전생을 통틀어 보살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전생에 국왕이나 부호 등의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코끼리나 원숭이, 새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도 나타나는데 이를 모두 보살이라 부르지요. 하나만 예를 들어볼까요?

석가모니 당시에 남달리 탐욕이 강한 비구가 있었는데, 석가모니는 이 비구에게 다음과 같은 전생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옛날에 ‘보살’이 선량한 비둘기로 태어났는데 어느 부호의 주방에 놓여있는 새장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이면 먹이를 구하러 나갔다가 저녁에 다시 돌아와 새장에서는 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탐욕스런 까마귀 한 마리가 비둘기가 살고 있는 주방의 고기 덩어리를 탐내서 비둘기와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까마귀가 호시탐탐 고깃덩어리를 노리자 비둘기는 경고를 하지요. “네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탐욕에 지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까마귀는 말을 듣지 않고 고기를 훔쳐 먹다가 주방장에게 잡혀 온몸이 뜨거운 물에 삶겨지는 고통을 당하지요. 비둘기는 저녁에 돌아와 이 모습을 보고 주방을 떠나게 되었고 까마귀는 결국 죽어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됩니다. 이야기를 마친 석가모니는 비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생의 탐욕스런 까마귀가 바로 너이고, 비둘기는 나였다.”

『자타카』에서 보살은 전생에 윤회를 반복하며 선업을 쌓아온 석가모니를 지칭하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불전에 등장하는 보살이란 용어는 석가모니가 부처님이 되기 전 수행자로서의 모습을 뜻합니다. 하지만 부처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99도씨의 물과 1도씨의 물은 아직 끓지 않았다는 점에서 같지만 체감 상 차이는 매우 크지요.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을 100도씨의 물이라고 한다면, 초기불전에서 석가모니를 보살이라 부르는 것은 99.999…도에 이른 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파불교의 보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100여 년이 지나자 하나였던 승단은 둘로 쪼개어지게 됩니다. 이를 근본분열이라고 합니다. 승단이 쪼개진 이유는 바로 계율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돈에 관련된 것이었지요. 부처님 재세 시에는 승가는 옷이나 음식을 보시 받았지만 돈을 직접적으로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한 인도의 일부지역에서 활동하던 후대의 승려들은 재가자에게 돈을 보시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돈을 받아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상좌부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돈을 받을 수도 있다는 대중부로 갈리게 됩니다. 대중부는 많은 수의 승려 대중이 여기에 찬성했기에 붙은 이름입니다. 상좌부란 소수파와 대중부란 다수파가 갈린 것입니다. 이렇게 근본분열이 일어난 이후 200여 년에 걸쳐 승단은 수차례 분열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렇게 승단이 여러 개로 쪼개어져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대해 각 부파마다 독특한 해석과 연구를 하던 시기를 부파불교의 시대라고 하지요. 부파불교 시대의 불교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저술로는 『비바사론』과 『아비달마구사론』이 있습니다. 이 두 저술은 대승불교에서 심화시킨 보살사상의 맹아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끕니다. 『비바사론』은 보살에 대해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유정으로서 어리석지 않은 자, 즉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가 보리살타이다.”

여기서 보살의 의미가 석가모니의 전생이나 수행자 시절만을 지칭하던 개념에서 벗어나 유정 전체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살의 더 중요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있습니다.

“이 살타(유정)는 보리를 좋아하고, 보리를 존중하며, 보리를 증득하기 위해 게으르지 않으며, 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보리살타라고 한다.”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내고 이를 실천하는 보살의 정의는 대승불교 경전에서 힘주어 강조하는 보살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보살에 대해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관점이 완전히 다를 것이란 우리의 예상은 어긋나버립니다. 대승불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부터 이어진 유구한 불교전통의 맥락 속에서 발현된 것이란 사실을 알 때 불교의 이해는 조금 더 깊어질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부파불교의 보살과 대승불교의 보살의 의미를 이어서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늘 건강하시고 신록처럼 싱그럽게 마음을 가꾸어나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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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글 |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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