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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1)
2019년 05월 01일 (수) [조회수 : 119]
   
 

그리운 어머니.

최근 일 때문에 전국의 사찰 열일곱 군데를 순례하고 왔습니다. 강원도를 제외한 전국을 한 바퀴 돈 셈인데 이미 한번 씩 가본 사찰이지만 다시 찾으니 느낌이 또 다르더군요. 절집 가운데 좋지 않은 곳이 없지만 굳이 꼽자면 지리산에 있는 구례 천은사가 참 좋았습니다. 맑은 개울물 소리와 대나무가 바람에 서걱거리는 소리, 거기에 산새소리까지 더해져 마음이 한없이 맑아지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논산에 있는 쌍계사도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가을 낙엽이 지고 찾았을 때는 쓸쓸했던 풍광이었지만 봄 햇살 속에서 반짝이는 대웅전과 야외에 모셔진 관음보살상의 미소는 저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더군요. 청주 월리사에선 주지스님과 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스님의 출가 전 이야기를 듣다보니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일어나고 인연으로 인해 사라짐을 새삼 깨닫기도 했지요. 긴 이야기를 마치고 밤에 뜬 보름달을 보았을 때 왜 절의 이름이 달 속의 절(月裡)인지 알 것도 같더군요.

빡빡한 일정에 힘도 들었지만 돌아보니 참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순례는 제 인생에 있어서도 큰 이정표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불교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면 닿을 수 없었던 기회와 경험을 지닐 수 있음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도 부처님의 가피겠지요. 그럼 오늘은 보살에 대한 이야기의 첫 실타래를 풀어보겠습니다.

보살의 성별

어머니, 한국의 절에선 여성불자를 ‘○○보살님’이라 부르지요. ‘입이 보살’이라고 경전에 나오는 큰 보살들처럼 깨달음의 서원(誓願)을 세워 불자답게 행하고 살라는 의미로 붙이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이 호칭이 다른 불교문화권에서 온 이에겐 충격인 경우도 있나봅니다. 티베트에 온 한 스님은 한국불교가 보살이란 말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하긴 불교사상사를 수놓은 수많은 스님들 가운데에서도 보살이란 존칭을 붙이는 경우는 『중론』을 쓴 용수(龍樹)보살이나 유식학(唯識學)을 정초한 세친(世親)보살 등 몇몇 뿐이니 그 스님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한국불교에서 남성불자는 거사(居士) 혹은 처사(處士)라고 부릅니다. 거사란 재가자이면서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하는데 《유마경》의 주인공인 유마거사와 중국의 방거사(龐居士)가 대표적입니다. 방거사를 소개하자면 중국의 선불교가 융성하던 8~9세기 무렵의 재가불자로 마조스님을 만나 깨친 뒤 집에 돌아와서 재산을 사람들에게 전부 나눠주고 자신과 가족은 오두막집을 짓고 쌀을 이는 조리를 만들어가며 연명했다고 전합니다. 예전에 성철스님이 만약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남에게 나눠주고 불법을 수행하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평생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목탁을 치며 예경하고 발까지 씻어주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방거사의 일화를 빗댄 것입니다. 거사란 말도 아무렇게나 붙이기엔 그 무게가 실로 가볍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가 자주 쓰는 처사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 불교용어는 아닙니다. 유학(儒學)을 공부했지만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거나 스스로 벼슬을 거부하고 초야에 묻혀 산 선비를 지칭하는 말이에요. 그렇기에 불자들은 되도록 유교적 색채가 짙은 처사란 말은 쓰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불교에서 보살과 거사란 말이 흔한 것은 한국의 특수한 언어적 풍토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가게에 물건 하나 사러가도 우리는 ‘사장님’, ‘사모님’이란 말을 듣게 되지요. 저의 경우 누가 저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걸 싫어합니다. 그냥 손님이라고 부르면 될 터인데 그러면 무례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존경하고 배움을 청할 수 있는 이에게 붙였던 ‘선생님’이란 귀한 말이 요즘 여기저기서 흔하게 넘쳐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호칭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극심하다보니 진짜와 가짜의 옥석을 가리기가 더 힘들어졌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왜 한국에선 여성재가자에게만 보살이라 부르는 것일까요? 불교의 보살들이 여성이기 때문일까요? 불상 옆에 자리한 보살상이나 탱화 속 보살은 치렁치렁한 긴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있어서 얼핏 여성으로 보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귀하고 상서로운 용모를 지닌 인도남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대표적인 보살인 관세음보살은 어떨까요?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면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중생을 자식처럼 여기는 인자한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지요. 하지만 관세음보살의 본래 성별이 여성이란 말은 경전에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관세음보살이 여성으로 각인된 이유는 중국 원나라 이후로 유행한 묘선(妙善)관음 설화 때문입니다. 그 설화에서는 보장왕의 딸인 묘선이 출가를 해서 결국 관세음보살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 한국에서 여성재가자를 보살이라 부르는 주된 이유는 이러한 설화의 영향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살이란 말을 남성재가자에게 붙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스님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대승보살계를 받지요. 스님이자 보살인 셈입니다. 이처럼 대승불교의 보살은 성별에 따라 붙이는 명칭이 아닙니다. 보살을 성별로 분별하려드는 순간 대승보살이 지닌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이 성별의 집착에서 떠난 것임을 잘 드러내는 경전으로는 《유마경》이 있습니다. 경에는 하늘에 사는 여인이 내려와 법문을 하는 대목이 있는데 사리불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물로 설정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사리불은 대승불법이 나타나기도 전에 죽었으니 억울한 일이지요. 경전에서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리불을 내세워 악역을 맡긴 이유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수승함을 상징적으로 보려주려는 설정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이 대승 공空이 지닌 참된 의미를 설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사리자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보듯 바로 사리불(사리자)이죠. 하여간 《유마경》에서 사리불은 천녀가 여성이란 것이 못마땅해서 시비를 겁니다.

“그대는 어찌해서 여인의 몸을 바꾸지 않는가?”
보살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감히 여성의 몸으로 나서냐는 비아냥거림입니다. 하지만 천녀의 침착한 대답은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이 무엇인지 쉽게 보여줍니다.
“내가 오랫동안 여자란 실체를 찾아보려 애써도 찾지 못하였는데 무엇을 바꾸라고 하십니까? 마술사가 환상으로 여인의 모습을 만들어냈는데, 어떤 사람이 묻기를 왜 그 여인을 남자로 몸을 바꾸지 않느냐고 묻는 게 과연 옳겠습니까?”
사리불은 마지못해 답을 합니다.
“뭐 그거야 옳지 아니하지. 마술로 인해 환상으로 생겨난 사람은 정해진 모양이 없거늘 무엇을 바꾸겠는가?”
천녀는 그 기세를 몰아 사리불을 몰아붙입니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정해진 모양이 없는 것인데 어찌해서 여인의 몸을 바꾸라 마라 하십니까?”
그 때 천녀가 신통력으로 자신과 사리불의 몸을 바꾸어 버리곤 결정타를 날립니다. 
“당신은 지금 여자의 몸이 되었는데 남자의 몸으로 바꿀 수 있습니까? 만약 남자의 몸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도 몸을 바꿀 수 있겠죠. 당신이 본래 여자는 아니지만 지금 여자의 몸으로 보이듯, 모든 여자들도 여자의 몸을 지녔지만 여자는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이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게지요.”

《유마경》에 따르면 남성이니 여성이니 하면서 성별에 집착하는 것은 환상에 홀려 실상을 깨닫지 못한 것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대승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는 《유마경》을 재가불자와 스님 간의 대결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견해야말로 《유마경》이 가장 경계하고 타파하고자하는 분별심입니다. 이처럼 공(空)은 모든 분별을 여읜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란 말이 한국에서 오직 여성재가자를 지칭하는 말처럼 굳어진 것은 아쉽습니다. 대승보살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선 이제는 남성재가자를 ‘○○거사’ 대신 ‘○○보살’이라고 함께 부르는 것은 어떨까요. 일상의 분별을 자꾸 무너뜨려야 불법의 대의에 조금이라도 다가서지 않을까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머니, 오늘은 보살의 성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보살이란 용어의 유래와 각종 보살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아들이 마음을 다해 기원합니다.

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글 |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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