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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연기(8)
2019년 04월 01일 (월) [조회수 : 37]

그리운 어머니.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라는 러시아의 작가는 어머니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유명한 고전인 『죄와 벌』을 쓴 작가니까요. 그의 작품은 인간이 지닌 저열함과 신성(神性)의 관계를 심도 있게 그려냅니다. 마치 인간의 마음을 진여문과 생멸문을 모두 지닌 여래장처럼 묘사해냅니다. 그 가운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카톨릭교가 이단에 대한 화형을 공공연히 집행하던 그때 어디선가 한 남자가 홀연히 나타나 민중들 사이를 다니면서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이를 살립니다. 예수가 재림한 것이지요. 그때 추기경이 이 장면을 보고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 화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하고 회유합니다. 예수는 추기경의 길고 긴 심문에 단 한마디의 대답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추기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다가가 조용히 키스를 하는 것으로 모든 대답을 대신하지요.
그때 추기경은 벌벌 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나가시오.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앞으론 절대, 절대로 찾아와선 안 되오.”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도 추기경은 진짜 예수를 몰아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불자들도 한 번 돌아보아야겠지요. 법당의 부처님에게만 절하고 가정과 이웃에 계시는 부처님들은 외면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십이연기의 지분(支分)

어머니, 오늘은 십이연기의 마지막 두 지분인 행(行)과 무명(無明)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11. 행(行)

“비구들이여, 행(行)이란 무엇인가? 행은 신행(身行), 구행(口行), 심행(心行), 이 셋이다.”

어머니, 행(行)은 불자들에게 꽤 낯익은 말입니다. ‘불교는 무엇보다 행이 근본이지.’라고 할 때나 ‘보현행원(普賢行願)’의 ‘행’은 실천수행을 뜻합니다. 그런데 십이연기의 ‘행’은 조금 다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행은 어떨까요? 제행무상이 무엇이냐 물으면 대부분은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의미.’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훌륭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이란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지요. 누군가가 ‘어디에 사세요?’고 물을 때 ‘지구에 살아요.’라고 대답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기회에 불교에서 말하는 행의 의미에 대해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행을 굳이 살피는 이유는 모든 불교공부가 그러하듯 지식을 더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과 수행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행(行)은 산스크리트 삼스카라(samskara)를 번역한 말입니다. 행은 다양하고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잠재한 어떤 경향성이나 의도, 혹은 ‘잠재적 에너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잠재적 에너지는 우리의 의식이나 언어적 작용, 신체적 느낌에 전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만약 수행으로써 끊어내지 않으면 잠재적 에너지는 고스란히 몸과 말과 생각의 현실행위로 표출되고 그 행위가 불러온 업력은 다시 잠재적 에너지로 쌓이게 됩니다. 악순환의 반복인 것이죠. 행은 다른 말로 업력이나 습習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부처님은 행을 신행, 구행, 심행으로 세분화 합니다. 신행(身行)이란 들숨과 날숨의 호흡을 말합니다. 그런데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그 호흡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작용과 갈애를 일으키는 인식작용의 전반을 말합니다. 이는 눈으로 대상을 보고, 귀, 코 등으로 감각대상을 인식하면서 그것에 얽매이게 되는 작용을 포함합니다.

구행(口行)은 심(尋)과 사(伺)와 관련이 있습니다. ‘심사’란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거칠고 미세한 마음의 작용을 이르는 말로 언어작용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언어라고 하면 말이나 글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의 일상적 생각과 관념은 바로 이 언어작용을 통해 생깁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잘 살펴보면 언어와 문장으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아, 이 집안일을 언제 다 마치지? 아, 피곤하다.’ 등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언어적 연쇄작용을 통해 상황을 판단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늘 ‘희론(戱論)을 짓지 말라.’라고 합니다. 희론이란 언어가 만들어내는 망상으로 토끼의 뿔, 거북이 털과 같은 것입니다. 뿔 달린 토끼나 껍질에 털이 난 거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어적 추론과 연쇄작용이 이루어지면 가공의 토끼 뿔이 실재가 되어 고통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상대방은 그 때 다른 생각에 깊게 빠져 있어서 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이런 경우 ‘바쁜가보네.’라고 덤덤하게 넘어가는 이가 있는 반면에 혼자서 심각한 생각에 빠지는 이도 있습니다.

‘내가 뭘 서운하게 한 것이 있나? 난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럼 나도 당할 수만 없지. 앞으론 나도 아는 척 말아야겠다.’

이런 것이 바로 희론의 작용인 것이지요. 오해와 의심이 유난히 많은 이들은 이러한 습(習)과 경향성으로서의 구행이 많이 축적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행(心行)은 느낌과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심행은 마음의 경향성과 의도라는 행(行)의 정의를 가장 포괄적으로 함축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마음씀씀이나 말과 행위는 행이란 자신의 습과 잠재성으로 인해 촉발되고, 그 행위의 업력은 다시 행으로 쌓여 끊임없이 고통의 윤회를 이루게 됩니다.

어머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배운 행(行)을 바탕으로 제행무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제행무상이란 우리 자신과 관련해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하나는 젊음은 짧고 즐거움도 금세 사라져 인생이 참 무상하다는 식의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을 불러오는 우리의 잠재적 기질이나 마음의 경향성은 고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따라서 수행(修行)이란 단순히 불상 앞에서 절이나 염불 등의 불교적 행위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타고난 잠재적 업력(行)을 닦아나가는(修) 일상의 모든 행위를 통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마음과 말,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겠지요.
  

12. 무명(無明)

“비구들이여, 무명이란 무엇인가? 무명은 고통에 대한 무지, 고통의 원인에 대한 무지, 고통의 소멸에 대한 무지,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무지이다.”

어머니, 불교에서 중생을 가리켜 무명(無明)중생이란 말을 씁니다. 무명은 말 그대로 밝음(明)이 없는(無) 상태입니다. 불빛이 없는 칠흑처럼 컴컴한 산길을 걷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넘어져 다치거나 길을 잃고 두려움에 떨게 되겠죠. 불교에서 밝음은 곧 지혜이고, 그 지혜란 사성제의 진리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앞서 사성제를 공부했으니 사성제가 무엇인지 대충은 압니다. 우리는 그나마 희미한 등불을 들고 밤길을 걷는다고 위안해야 할까요? 그런데 사성제를 안다고 할 때 ‘안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쿠바의 수도가 아바나인 것을 안다.’와 ‘독약을 마시면 죽는다는 것을 안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의 것은 행여 모르더라도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보의 일종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의 것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앎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독극물이란 것을 아는 이상 절대 마시지 않습니다. 마시면 죽는다는 것을 너무도 확연히 ‘알기’ 때문입니다.

사성제에 대한 앎은 어디에 속할까요? 만약 사성제를 공부했더라도 ‘쿠바의 수도는 아바나이다’처럼 암기했다면 공허한 지식일 뿐입니다. 만약 사성제를 벗어난 삶이 독극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죽음과 고통으로 이끌게 됨을 확실히 알 때 비로소 사성제는 내 삶 속으로 들어와 부처님의 지혜를 갖추게 됩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을 내 삶의 토대이자 실천의 바탕으로 삼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불교상식을 하나 더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이익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불교공부를 짧지 않게 해왔지만 아직 무명중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산다는 사실을 아프게 되짚어보겠습니다. 무명중생이란 다른 말로 고통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중생이란 뜻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어머니, 오늘 ‘행’과 ‘무명’을 살펴봄으로써 십이연기의 지분에 대한 긴 공부를 일단락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보살(菩薩)’이란 주제로 함께 공부해보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아들이 기원합니다.

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글 |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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