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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연기 (4)
2018년 12월 01일 (토) [조회수 : 314]
   
 

그리운 어머니.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시간이란 것이 참 속절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절없는 시간이 없었으면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벼의 모종은 익어서 우리의 식탁을 채우지 못했겠지요. 같은 시간 속에 누군가는 생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누군가는 생의 한 가운데로 진입합니다. 시간의 역설이지요. 생사 문제를 화롯불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담담히 여겼던 서산대사는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일갈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선사 이야기를 하니 성철스님의 유명한 TV 인터뷰 장면이 떠오르네요. 어떤 기자가 스님을 찾아가 “스님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스님은 “내 말에 속지마라, 나는 전부 다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여.”하고 손사래를 치는 장면이지요. 서양에서는 ‘크레타인의 역설’이란 것이 있습니다. 크레타인인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인은 다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면서 불거진 문제입니다. 에피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크레타인은 다 거짓말쟁이고 에피메니데스도 크레타인이니 그의 말 자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는 역설에 빠집니다. 이와 똑같이 자신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성철스님의 그 말은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아마 이 말에 담겨있는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읽는 이가 있다면 성철스님이 임종게로 남긴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 그 죄업이 수미산을 넘친다.”라는 의미도 간취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십이연기의 지분支分

어머니, 지난 시간에는 십이연기 지분 가운데 노사와 생을 살펴보았습니다. 부처님은 노사老死라는 고통은 태어남生을 근거로 발생한다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생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일까요. 바로 유有입니다.

3. 유有
유有란 말 그대로 풀면 ‘있다’라는 뜻입니다. 범어로는 ‘브하바bhava’인데 있다, 되다 같은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전에서는 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유란 무엇인가? 욕유欲有, 색유色有, 무색유無色有의 세 가지이다.

십이연기의 유는 욕유, 색유, 무색유입니다. 경전에서는 세 가지 유를 다시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세계를 불교에서는 삼계三界라고 합니다. 예불문에 등장하는 ‘삼계도사 사생자부’에서 삼계도사三界導師란 부처님이 세 세계의 중생들을 이끄는 탁월한 스승이란 뜻이지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정의를 경전에서 살펴볼까요? 
 
거기에서 무엇이 욕계인가? 아래로부터 아비지옥이 경계가 되고 위로는 신神이 경계가 되는 것처럼 욕유를 욕계라 한다. 아래로부터 범천이 경계가 되고 위로는 색구경천色究竟天이 경계가 되는 것처럼 색유는 색계라 한다. 아래로는 공처空處에 도달된 신들이 경계가 되고 위로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가 경계가 되는 것처럼 무색유는 무색계라고 한다.

욕계는 오취五趣인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天을 의미합니다. 불교에서 육도윤회를 한다고 할 때는 바로 이 오취에서 아수라를 붙여 육도가 되는 것입니다. 욕계는 말 그대로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이죠. 색계에서 색色은 물질을 뜻합니다. 즉 욕망은 사라졌으나 물질은 여전히 남아있는 세계입니다. 범중천梵衆天에서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는 열다섯 가지의 세계입니다. 무색계는 욕망과 물질이 모두 사라진 세계를 의미합니다. 공처, 식처識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의 네 가지 세계이죠.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세계가 선정禪定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붓다가 되기 전에 여러 스승을 만나 수행을 하며 배운 것은 무색계의 마지막 두 단계인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로선 윤회의 굴레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없었던 싯다르타는 홀로 수행해서 상수멸정想受滅定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상수멸정은 언어적 분별, 호흡과 육체적 느낌, 의식의 활동마저 모두 사라진 상태로 설명됩니다. 상수멸정을 삼계를 벗어났다는 붓다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면 여기서 우리는 거꾸로 십이연기에서 말하는 유有, 즉 삼계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삼계란 바로 욕망과 육체, 느낌과 분별이 지배하는 물질과 의식의 세계입니다. 윤회의 고통은 생명의 탄생에서 생기고, 그 탄생은 유有에서 비롯함을 십이연기는 말하고 있는 것이죠.
  
4. 취取
비구들이여, 취란 무엇인가? 취는 네 가지이다. 욕취欲取, 견취見取, 계금취戒禁取, 아어취我語取이다.

취取란 한자로는 가진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취의 원어인 ‘우파다나upadana’는 어딘가에 들러붙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취를 취착取着이라고도 합니다. 불가에서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번뇌하는 이에게 ‘착着을 내려놓아라.’라고 하지요. 그때 말하는 착이 바로 취착입니다. 취는 또 연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취를 연료로 삼아 이로 인해 미혹한 삼계인 유有의 세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죠.

경전에서는 취를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욕취는 욕망을 따라 생기는 오욕락五欲樂인 재물욕, 성욕, 식욕, 수면욕, 명예욕을 말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번뇌입니다. 견취는 팔정도의 정견正見과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는 것입니다. 고집멸도의 사성제에 대한 바른 견해와는 달리 영원한 자아가 있다, 세상은 영원하다, 쾌락은 지속된다 등의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계금취는 계율이나 금지를 고수하면서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어떤 의식을 하지 않거나, 반대로 어떤 금지를 어기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고 집착하는 경우입니다. 일상에서 편집증이나 징크스가 이에 해당되지요. 특히 계금취는 사회적 문제가 되어온 사이비종교의 교리에서 빈번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나 타인의 신체를 손상시켜야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재산을 교주에게 바치고 집단생활을 해야 천국에 간다는 등의 그릇된 계율과 이에 대한 믿음이 계금취입니다. 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나 믿음을 올바른 이해 없이 맹신하는 것도 계금취에 포함됩니다.

마지막 아어취는 아취我取라고도 하는데 나와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아어취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고 붓다 또한 아어취에 대한 이해가 가장 어렵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욕취가 욕계에 발생하는 욕망에 대한 집착이라면 아취는 욕계를 벗어나 색계와 무색계에 다다른 나의 경지가 너무나 좋고 사랑스럽다고 여겨 거기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으리라 봅니다.

어머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십이연기의 취가 지니는 성질입니다. 붓다는 인간은 고정불변의 나라는 것이 없고 단지 오온색, 수, 상, 행, 식의 무더기들이 결합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래서 붓다도 오온의 무더기이고, 우리도 오온의 무더기로 평등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와 붓다는 같은 오온의 무더기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중생의 오온은 ‘취’가 들러붙어서 결합된 오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오온을 오취온五取蘊이라는 말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취와 오취온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실제로 경전에서는 한 비구가 붓다를 찾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취가 오취온입니까? 아니면 오취온을 제외하고 취가 따로 있습니까?”
“비구여, 취가 오취온인 것도 아니고, 오취온을 제외하고 따로 취가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욕탐欲貪이 있으면 취가 있다.”

붓다의 대답은 늘 불일불이不一不二입니다. 취와 오취온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욕망과 탐욕이란 원인이 있는 곳에는 취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세속적 욕망을 붙들고 있는 한 우리는 욕망 자체가 되지만, 집착을 떨쳐내기만 하면 더할 것 없는 부처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취는 우리의 오온과 동떨어진 추상적 개념도 아니고, 오온이 곧 취인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십이연기의 각 지분을 공부할 때 늘 염두에 두어야할 불일불이의 입장입니다. 십이연기의 지분을 이해하는 한 가지 비밀을 더 말씀드리자면 생사윤회를 가져오는 고통을 추적한 12가지 지분이 결국 욕망과 탐욕, 갈애와 무명이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볼 갈애渴愛에서 구체적으로 공부해보겠습니다.

어머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늘 웃는 날이 되시길 아들이 기원합니다.

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글 |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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