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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연기 (3)
2018년 11월 01일 (목) [조회수 : 156]
   
 

그리운 어머니.

얼마 전에 장수에 관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장수하는지 조사를 해봤더니 먹는 것이나 사는 곳은 다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아주 원만했다는 겁니다. 자잘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남이 상처를 준 일에 연연하지 않으며, 많이 웃으며 사는 이들이었지요. 살면서 웃을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님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지혜와 복덕을 다 갖춘 붓다조차도 많은 이들의 시기와 비방을 당했습니다. 경전에는 붓다에게 찾아와 심한 욕설을 한 어느 이웃종교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붓다는 묵묵히 그 욕설을 다 듣고 있었지요. 그가 나간 후 제자 아난이 붓다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고 묻자, 붓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가 어떤 집에 식사를 초대 받았지만,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면 그 음식은 네 것이냐, 그 주인의 것이냐?” 

조건에 따라 희비가 오가는 이를 중생이라 하고, 조건에 연연하지 않고 행복한 이는 붓다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어머니도 새가 날아가도 흔적이 남지 않는 허공처럼 맑고 광활한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십이연기의 지분(支分)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어머니, 위와 같은 십이연기는 붓다가 노사를 해소하기 위해 그 원인을 추적해나가면서 성립된 것입니다. 우리도 붓다처럼 노사에서 시작해 무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따라 경전에 나온 말씀을 토대로 십이연기의 각 지분을 이해보겠습니다.

1. 노사(老死)
노사는 늙음과 죽음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자면 고통이지요. 붓다는 늙음과 죽음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구들이여, 늙음이란 모든 중생이 겪는 늙은 상태, 이가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되고, 피부가 주름지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고, 신체의 기능이 저하된 것을 말한다. 죽음이란 사라짐, 세상을 떠남, 생명과 육신의 소멸, 오취온의 파괴, 시체의 안치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늙음이나 죽음에 관한 정의와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죽음을 ‘오취온(五取蘊)의 파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취온은 불교에서 사람을 구성한다고 말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蘊)를 말합니다. 바로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지요. 곧 우리를 이루는 육체와 정신적 요소들입니다. 붓다는 이런 요소의 무더기들이 연기적으로 묶여진 것이 ‘나’라고 했습니다. 결국 육신이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영혼이나 ‘나’라고 말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무아(無我)라고 하지요.
그런데 붓다의 가르침을 오해한 어떤 비구는 오온 가운데 식(識), 의식이 ‘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다녔습니다. 붓다는 그 비구를 불러 평소의 자비로운 모습과는 다르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매섭게 혼을 냅니다. 붓다는 그에게 색·수·상·행·식 가운데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고 다시 가르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나란 오온의 결합’이라고 말하는 진짜 의미입니다. 즉 오온은 무아(無我)와 연기법이 적용되는 개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음을 맞이했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저승사자나 사신(死神)이 죽음이란 것을 들고 사람을 찾아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설화도 있지요. 동방삭이란 인물은 저승사자죽음를 얼마나 잘 피해서 다녔는지 삼 천 갑자를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꾀를 써서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냇가에 앉아 숯을 씻자 지나가던 동방삭이 궁금해서 뭘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숯을 씻어서 하얗게 만들려고 한다는 저승사자의 대답에 동방삭은 무심코 ‘내 삼천 살을 살았지만 그런 말은 처음 듣네.’라고 말하는 바람에 정체가 드러나서 저승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죽음은 이와 같이 어떤 손님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가 십이연기를 설하자 어떤 비구가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노사입니까? 이것은 누구의 노사입니까?”

이때 붓다는 질문 자체가 옳지 않다고 말하지요. 노사란 현상과 노사를 겪는 사람을 분리해서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 따로, 노사 따로 생각하는 걸 두고 옳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노사를 겪는 사람과 노사가 불이(不二), 즉 다르지 않다는 측면입니다.

그렇다고 노사를 겪는 사람 자체가 곧 노사라고 이해해버리면 앞에서 본 비구처럼 부처님이 불러서 ‘이 어리석은 자여!’라고 혼을 내실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노사를 겪는 자가 곧 노사라면 그의 고정적 본질은 노사가 되기에 붓다가 가르친 무아와는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노사를 겪는 자와 노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불일(不一)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불교의 연기법은 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긴장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지요. 참 어렵고 미묘한 가르침인데 이것을 여실(如實)히 알면 불교의 핵심을 꿰뚫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머니, ‘불일불이’가 불교의 골수라면 왜 절에는 불이문(不二門)만 있고, 불일문(不一門)은 없을까요? 불이가 불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까요? 사실 불이문 앞에 생략된 말은 ‘불일’입니다. 원래는 ‘불일불이문’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곰곰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생과 부처가 같지 않다는 사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압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부처입니까’라고 물으면 화들짝 놀라며 ‘아닙니다. 저는 중생입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하지만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부처님은 ‘중생이 부처와 원래 다르지 않지만, 중생은 이것을 모른다.’라고 했지요. 서로 다르게 보이는 중생과 부처가 실은 둘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연히 깨달은 이, 즉 부처님만 아시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중생과 부처가 다르다고 분별하는 중생을 가르칠 때 불일보다는 불이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중생과 부처가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는 불일불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수행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중생은 부처가 아니기에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합니다.(不一) 그러나 중생이 본래 부처가 아니라면 수행을 아무리 해도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不二) 철을 아무리 녹이고 두드려 제련해도 금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참 깊고 오묘한 이치입니다. 십이연기의 노사를 말하면서 불일불이의 이치를 말씀드리는 것은 앞으로 등장할 십이연기의 지분이 나의 본질적 요소라거나 혹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섭니다. 각 지분은 오온처럼 연기되어 있음을 알려줄 뿐입니다. 그래서 십이‘연기’라고 하는 것이지요. ‘불일불이’가 바탕에 서있지 않으면 불교를 공부한답시고 엉뚱한 길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2. 생(生)
붓다는 노사의 원인을 여리작의(如理作意), 지혜로써 숙고함 하다 보니 생이란 것 때문에 노사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태어나지 않으면 늙고 죽을 일이 애초에 없겠지요. 경전에서는 생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비구들이여, 생이란 무엇인가? 모든 중생에게 해당하는 출생, 하강(下降), 전생(轉生), 오취온의 나타남, 12처의 획득이다.

전생은 생을 전전한다는 뜻으로 윤회를 의미합니다. 하강은 하늘에서 즐거움을 누리던 천인의 경우 그 업력이 다하면 다시 윤회를 통해 세상으로 내려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경우엔 그냥 출생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12처란 사람의 감각기관인 안눈, 이귀, 비코, 설혀, 신몸, 의정신의 육근(六根)과 그 감각기관 각각에 대응하는 색물질, 성소리, 향냄새, 미맛, 촉감촉, 법생각의 대상을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12처의 획득이란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각을 느끼는 생명이 탄생한다는 개념입니다. 즉 인간만 아니라 동물도 이에 해당하겠지요. 즉 생이란 생명을 가진 존재가 윤회를 통해 노사를 겪어야하는 세상에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생(生)이란 무엇을 조건으로 발생하게 되는가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有)입니다. 유(有)부터는 다음에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오늘은 십이연기 가운데 노사와 생의 의미를 공부해보았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불일불이의 이치를 꾸준히 새기면 어머니의 정진에 큰 도약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머니, 건강하시길 항상 아들이 기원하고 있습니다.

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글 |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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