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8 토 16:40
> 뉴스 > 기획칼럼 > 아들이 들려드리는 불교이야기
     
‘고통의 소멸’에 관한 거룩한 진리 (5)
2018년 07월 01일 (일) [조회수 : 191]
   
 

그리운 어머니.
요즘도 열심히 경전공부를 하고 계신가요? 그러고 보면 예전에 비해 불교공부하기가 좋아졌습니다. 다양한 책들이 나오고, 인터넷이나 유튜브로 동영상 법문이나 강의도 무료로 찾아 볼 수 있어서 혼자서 공부하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 되었지요. 그런데 넘쳐나는 책과 법문 속에서도 불교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가 보입니다. 어려운 한자말들이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죠. 화엄의 골수를 담고 있다는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210자 <법성게> 가운데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라는 구절이 있지요. 최근에 한 책을 보다가 이걸 ‘무연의 선교로 여의를 잡아’라고 해석한 것을 보았습니다. 화엄을 전공한 학자가 아니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르더라도 다라니처럼 무작정 외우면 될까요? 불교의 언어가 시대와 통하지 않으면 그 정신도 머지않아 사라지겠죠. 특히나 한글전용세대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이 전해지려면 우선 불교의 말부터 쉽게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른 알아차림>

어머니, 오늘은 팔정도 가운데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정념(正念), 즉 ‘바른 알아차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정념은 팔정도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행이지요. 여기서는 정념을 ‘바른 알아차림’으로 썼지만, 사람에 따라 ‘바른 기억’, ‘바른 주시’, ‘바른 마음챙김’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뭘 알아차리고, 뭘 챙긴다는 말일까요?
정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명상이나 마음수행과 같은 실천적이고 체험적인 부분에 맞닿아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구체적 체험이나 양상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그 주관적 체험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부분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초기경전에 나타난 정념과 아비달마불교에서 해석한 정념,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바라본 정념은 각각 그 위상과 내용이 다르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그러한 내용을 모두 알아야 바른 알아차림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초기경전에 나온 간략한 설명을 토대로 정념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것이 현재 자신의 수행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혹은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족할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의 〈진리분석의 경〉은 바른 알아차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른 알아차림입니까?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부지런하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부지런하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부지런하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부지런하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머뭅니다.
이를 일러 바른 알아차림이라 합니다.”

우선 경에 나타난 네 가지 관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경은 몸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고, 법을 관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관찰해야하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의 네 가지를 보통 ‘사념처(四念處)’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경전에 나타난 몸이 무엇인지, 느낌이 무엇인지, 마음이 무엇인지, 법이 무엇인지는 아시겠습니까? 여전히 추상적이고 애매한 말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를 비교적 자세히 풀어놓은 《염처경》을 살펴봐야 합니다.

경에 의하면 몸에 대해 관찰은 우리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목숨’이란 말 자체가 들숨과 날숨을 쉬며 살아가는 생명체의 힘을 뜻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평상시 가장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숨입니다. 숨을 의식하게 되는 경우는 오직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뿐입니다. 경전은 생명의 핵심이지만 잊어버리고 사는 들숨과 날숨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길게 내쉬고 있구나’, ‘짧게 내쉬고 있구나’ 등을 몸 전체의 경험으로 알아차리라는 것이죠.

다음은 걷고, 앉고, 눕고, 먹고, 마시고, 배변하는 모든 것들을 관찰하면서 몸이 그러함을 분명히 알아차리라고 말합니다. 매순간 깨어있으란 뜻입니다. 몸에 대한 여러 과정이 있지만 마지막에는 우리가 죽어서 시체가 되고 그 백골이 티끌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왜 경전에선 극단적으로 시체나 해골까지 관찰하라고 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들이 몸을 ‘자아’로 여기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나 남들에게 보이는 내 몸뚱어리가 나라고 여기면서 어떨 땐 우쭐하기도 하고 어떨 땐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몸은 언젠가는 먼지로 사라질 존재지요. 사념처 수행의 첫 항목이 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나’라는 집착을 깨고 무아와 무상의 진리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느낌에 대한 관찰은 세 가지 종류의 느낌이나 감각을 대상으로 합니다.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느낌을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내 느낌(감각)과 관찰하는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느낌을 관찰하라는 것은 그 느낌에 휘말리지 않고, 제3자로서 냉정하게 관찰하고 알아차린단 뜻입니다. 느낌에 대한 분명하고 지속적인 알아차림으로 인해 우리는 느낌의 발생과 소멸을 파악하게 되고, 그로인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머물 수 있는 것이죠.

셋째는 마음에 대한 관찰입니다. 마음이라니 너무 방대한 단어입니다. 팔만대장경이 마음 심(心) 한 자로 압축할 수 있다고들 하지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온갖 부정적 감정이나 그 감정이 사라진 상태를 총칭해서 말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三毒)과 그것이 사라진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성내는 마음은 앞에서 살펴본 느낌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즐거운 느낌이나 감각을 통해 행복해하고, 불쾌한 느낌이면 성을 내곤 하지요. 그런데 불쾌함 때문에 화난 사람은 자신이 화가 난 것을 모릅니다. 옆에서 화내지 말라고 말해주면 그 사람은 자신은 화가 난 게 아니라고 도리어 더 크게 화를 내기 일쑤입니다. 내 눈이 내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화와 이미 하나가 된 사람은 화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온한 마음으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사람은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압니다. 만약 화가 났음을 스스로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다면 화가 사라집니다. 화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신이 화에서 분리되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죠. 화가 사라지면 사라졌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백히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사념처 수행의 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념처 가운데 법(法)에 대한 관찰입니다. 법은 ‘다르마’의 한역인데, 보통 진리, 존재, 세상, 붓다의 가르침 등의 매우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법에 대한 관찰은 오온, 12처, 칠각지, 사성제에 대한 관찰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아라고 여기는 것, 우리의 삶을 고통의 족쇄로 이끄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가르침에 대한 관찰입니다. 앞서 세 가지 알아차림이 우리의 육신과 감각, 그리고 감정들에 대한 관찰을 말한다면, 네 번째 법에 대한 관찰은 이러한 것들을 불교적 진리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관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쉽지만 여기서 오온, 12처, 칠각지 등을 상세히 풀기는 어렵고 각각의 주제에 대해선 따로 살펴볼 기회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사념처 수행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경전은 “비구들이여! 열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올바른 길이 바로 사념처이다.”라고 말하면서 늦어도 7년, 빠르면 7일 안에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수행을 위해 조용한 곳을 찾거나 멀리 갈 필요가 있을까요? 숨 쉬고 먹고 눕는 것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수행이 된다는 것은 곧 일상의 삶, 모든 것이 수행거리라는 뜻이니까요.

어머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정진과 수행이 빚어내는 마음의 향기 속에서 늘 평온하시길 기원합니다. 건강하세요.

글 | 강호진 (작가)
글 | 강호진 (작가)의 다른기사 보기  
ⓒ 미디어조계사(http://news.jogyesa.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조계사뉴스
‘백만원력 결집불사 저금통과 약정금 ...
노드정보기술, 열화상 카메라 기증
화엄성중기도 입재식 봉행
문화
방송
조계사 정초7일기도회향 원행스님 ...
조계사 정초7일기도입재 지현스님 ...
조계사 일요법회 진우스님 법문(2...
기획칼럼
고달픈 민초들의 염원, 미륵의 세상을...
좋은 인연 만들기
보살(12)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3144)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 Tel 02-768-8600 Fax 02-720-2299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수용
Copyright 2010 미디어조계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