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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불교의 기둥을 세운 법흥왕 (2)
2017년 09월 01일 (금) [조회수 : 136]

   
▲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은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를 완성하고 왕권을 굳건히 구축했다. 법흥왕 이후 신라사회는 마침내 고대 왕권 국가로써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군주로써 법흥왕은 노련한 정치감각과 과감한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하지만 법흥왕의 단점은 여색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로 인해 후계 과정에서 진통을 겪게 된다.
법흥왕 재위시절, 신심 깊은 불제자였던 이차돈은 불교의 공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불교에 반발해온 귀족들은 불사를 일으키던 이차돈이 왕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일어났던 기적을 목도하고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백성들 사이에서는 부처님의 영험함에 대한 소문이 날로 커져갔다. 이차돈의 순교 덕분에 귀족들은 불교 공인을 반대할 명분이 사라졌고, 불교에 귀의하는 백성들은 날로 늘어갔다. 불제자인 동시에 강력한 전륜성왕을 꿈꾸던 법흥왕에겐 이 모든 것이 왕권 강화의 기회였다.


부처님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라의 왕들

율령(행정·형벌에 관한 법규제도)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은 왕족과 귀족을 성골과 진골로 나뉘어 구분을 지었다. 법흥왕 이후 신라의 왕족은 부처님의 일족으로 격상되었고, 불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일족과 같은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혈통에 신성함을 더했다.
또한 법흥왕은 귀족들과 관리들의 구분도 철저하게 정비했다. 법흥왕 때부터 신라의 관리들은 16개(혹은 17개)로 나뉜 품계(두품)에 따라 각기 다른 색상의 관복을 입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이다. 이 중 성골은 왕위를 계승했고, 진골 귀족은 1~5등급까지의 요직을 독점했고, 6두품은 두품 중에서는 가장 높았으나 6등급 이상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이처럼 왕족과 귀족의 신분과 관리와 평민 사이의 등급 서열이 가지런해지면서 체계는 단단해졌고 왕권은 견고해졌다.
성골과 진골로 왕족과 귀족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혈통은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법흥왕의 혈통은 완벽했다. 그는 제22대 지증왕과 그의 왕비 연제부인의 장남이었고, 왕위에 오르기 전 이미 태자의 자리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제23대 소지왕의 하나뿐인 사위이기도 했다. 소지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왕비 선혜부인 사이에서 ‘보도’라는 이름의 공주 하나를 둔 것이 전부였다.
법흥왕은 태자시절 보도공주와 혼인을 하여 왕위계승서열에서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다. 고대 신라 사회에서 왕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 사위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는 빈번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 법흥왕에게 부인은 보도공주 한 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후, 법흥왕은 많은 후궁을 두었고, 그의 가계도는 매우 복잡해졌다.


법흥왕의 여인, 벽화와 오도

법흥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첫 번째 여인은 소지왕의 두 번째 왕비였던 벽화부인이었다. 소지왕 재위 말년, 선혜부인은 승려 묘심과의 불륜이 발각되어 왕비의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 후 소지왕은 섬신공 파로가 바친 그의 아름다운 딸 벽화를 후궁으로 맞았다. 왕비의 자리가 비어있는 상태에서 맞은 후궁이었기에 벽화의 지위와 권세는 왕비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미 환갑이 넘었던 소지왕은 벽화를 후궁으로 맞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혈통을 중시하는 신라 왕실에서 하급 관리의 딸에 불과한 벽화는 이방인이었다. 그녀의 친정은 번듯한 귀족집안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골품이 없었다. 소지왕이 승하하자 벽화는 기댈 곳이 없었다. 그때 법흥왕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당시 태자의 신분이었던 그는 젊고 건장하며 잘생긴 남자였고, 장차 왕위에 오를 사람이었다. 지증왕 재위 시절, 두 사람은 보는 눈을 의식하여 서로를 그리워하기만 했다. 하지만 법흥왕이 왕위에 오르자 벽화부인은 자연스럽게 그의 후궁이 되었다.

법흥왕의 총애를 받은 두 번째 여인은 오도였다. 오도는 선혜부인과 승려 묘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법흥왕의 왕비 보도부인과 아버지가 다른 이부자매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왕비 보도부인은 성골이었으나 오도는 골품이 없었다. 다만 그녀는 미모가 출중했고 출생의 비밀만큼 묘한 매력이 있었다. 결국 법흥왕은 오도를 후궁으로 삼았다. 그렇게 벽화부인과 오도는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마복칠성과 위화,
법흥왕의 총애를 받다 

벽화부인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신라에서는 부모나 형제, 남매나 자매 사이에 이름으로 돌림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다. 벽화부인의 어머니는 ‘벽아’였고, 벽화부인의 남동생은 ‘위화’였다. 위화는 누나와 마찬가지로 비록 골품은 없었으나 빼어난 미모를 지닌 미남자였다. 그는 누나 벽화가 후궁이 되어 소지왕의 총애를 받자 왕의 처남이라는 신분으로 왕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위화는 소지왕이 아끼는 자신 또래의 젊은 귀족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소지왕은 자신과 가까우면서도 충성스런 신하 일곱 명을 골라 이들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아꼈다. 일명 ‘마복칠성’으로 불리는 이들의 앞날은 창창했다. 마복칠성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사부이다. 이사부는 신라에서 처음으로 ‘군주’ 지위를 받았으며 지혜로써 우산도(울릉도)를 정복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는 또한 전장에서는 가장 용맹한 장수이기도 했다. 훗날 이사부는 법흥왕의 외동딸인 지소공주의 두 번째 남편이 되었다.
마복칠성은 소지왕의 사람들이었으나 실질적인 우두머리는 법흥왕이었다. 태자 시절부터 법흥왕은 마복칠성과 자주 어울렸다. 마복칠성은 장차 왕위에 오를 태자 원종(훗날의 법흥왕)을 깍듯하게 섬겼다. 위화의 신분이나 혈통으로는 마복칠성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그는 타고난 미모와 매력으로 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위화의 매력은 권력에 관심도, 욕심도 없다는 것이었다. 마복칠성이 법흥왕을 섬기는 이유는 권력 때문이었지만 위화는 관직을 요구한 적도 없었고, 재산을 축적하지도 않았다. 왕실 인척이면서도 위화는 신분과 제도로부터 자유로웠고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았다. 이러한 성품 덕분에 그는 왕들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귀족들도 그를 견제하지 않았으며 마복칠성 또한 위화를 환영했다.


왕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

법흥왕에게 위화는 각별한 존재였다. 사랑하는 여인 벽화의 남동생이었고, 복잡한 권력구조와 정치에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법흥왕은 그를 가까이 두었다. 위화 앞에서는 굳이 권력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고, 충성을 강요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이 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다. 위화가 법흥왕의 후궁 오도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오도가 법흥왕의 후궁이 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법흥왕이 그녀를 원했기 때문이다. 언니 보도부인이 왕비로 있고, 소지왕의 후궁이었던 벽화부인이 법흥왕의 총애를 독차지한 왕궁에서 오도의 처지는 애매했다. 그러던 중 신분이나 출신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위화를 만나게 된 것이다. 오도는 자신도 모르게 위화에게 점점 사랑을 느꼈고 결국 위화도 오도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왕궁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먼저 위화의 누나 벽화부인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녀는 오도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하나뿐인 남동생 위화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 분노한 사람은 법흥왕이었다. 그 동안 법흥왕은 늘 위화를 아껴왔기에 배신감은 더 컸다. 그는 위화가 자신의 후궁 오도를 마음에 품었다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오도는 궁에서 쫓겨났고 감히 왕의 여인을 사랑한 위화 또한 죄인의 몸이 되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은 두 사람은 궁 밖에 살림을 차리고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법흥왕과 벽화부인 모두 반대한 혼인이었기에 두 사람의 결혼은 인정받지 못했다. 신라 귀족 사회에서 아무리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불륜과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은 골품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도와 위화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권력과 완전히 멀어진 위화는 오도와의 사이에서 ‘옥진’과 ‘금진’이라는 두 딸을 낳았다. 아버지 위화와 어머니 오도를 닮아 달처럼 예쁜 얼굴을 가진 딸들이었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글: 조민기(칼럼니스트)
삽화 : 견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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